[전남인터넷신문]치유농장에서는 보통 어떤 식물을 이용하고, 어떤 체험을 하며, 참여자에게 어떤 치유 효과를 제공하는지가 관심의 중심이 된다. 그런데 농장을 조금 넓게 바라보면 또 다른 모습이 보인다. 농장에서 사용하는 식물과 자재는 어디에서 왔으며, 체험 후 남은 식물과 부산물은 어디로 가는가. 프로그램에서 만들어진 수입은 지역에서 어떻게 쓰이고, 농장과 지역사회에는 어떤 관계가 축적되는가. 이러한 질문은 치유농업을 순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인물이 영국의 경제학자 케이트 라워스(Kate Raworth)이다. 라워스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철학·경제학(PPE)을 공부하고 같은 대학에서 개발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초기에는 탄자니아 잔지바르의 마을에서 소규모 사업자들과 일했고, 이후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Oxfam)에서 약 10년간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옥스퍼드대학교 환경변화연구소(Environmental Change Institute)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암스테르담 응용과학대학교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도넛경제학액션랩(Doughnut Economics Action Lab, DEAL)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하다.
라워스가 국제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도넛(Doughnut)’이라는 독특한 경제 모델이었다. 이 개념은 2012년 옥스팜 보고서를 통해 처음 제시됐으며, 2017년 『도넛경제학(Doughnut Economics: Seven Ways to Think Like a 21st-Century Economist)』을 출간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도넛의 안쪽 경계는 식량, 건강, 교육, 소득과 일자리, 주거 등 인간다운 삶에 필요한 사회적 기초를 나타낸다. 바깥쪽 경계는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손실 등을 포함한 지구 생태계의 한계를 나타낸다. 두 경계 사이가 인간이 생태적 한계를 지키면서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다.
라워스의 생각 가운데 치유농업과 특히 연결해 볼 만한 것이 ‘재생적 설계(regenerative by design)’와 ‘분배적 설계(distributive by design)’이다. 그는 경제를 설계할 때 자연의 순환 속에서 자원을 활용하고 생태계를 재생시키는 구조를 만들며, 경제활동에서 창출된 가치와 기회가 참여자들에게 폭넓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도넛경제학의 실천 원칙에서도 살아 있는 세계의 순환 속에서 활동하고, 만들어진 가치를 함께 창출한 사람들과 공유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치유농업은 이러한 생각을 현장에서 적용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농업 자체가 흙과 물, 식물, 미생물, 햇빛과 계절의 순환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람과 지역경제를 연결하면 치유농장은 작은 순환경제의 공간으로 발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치유농장에서 허브를 재배한다면 허브는 경관과 향기 체험에 이용되고, 수확한 잎은 차와 음식의 재료가 된다. 일부는 건조해 향주머니와 공예품의 소재가 되며, 남은 식물은 퇴비가 되어 밭으로 돌아갈 수 있다. 씨앗을 받아 다음 해 재배에 이용하면 재배-체험-가공-상품-퇴비-재배로 이어지는 순환구조가 만들어진다.
꽃도 마찬가지다. 농장에서 생산한 꽃은 원예치유 프로그램에 활용하고 남은 꽃은 압화나 건조화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 염색에 적합한 꽃과 잎은 천연염색 체험으로 연결할 수 있다. 가지치기한 나뭇가지와 볏짚, 왕겨, 대나무, 풀, 열매껍질 같은 농업 부산물도 공예와 놀이·치유 프로그램의 자원이 된다. 한 번 생산한 농업자원이 여러 차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구조이다.
여기에 ‘분배적 설계’를 적용하면 순환의 범위가 지역으로 확대된다. 치유농장이 지역 농가의 꽃과 허브를 구입하고, 지역 공예가와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마을 주민이 음식 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역 가공업체가 상품 생산에 참여하면 치유농업에서 발생한 경제적 가치가 지역의 여러 주체에게 연결된다. 농장 안에서는 자원이 순환하고 농장 밖에서는 사람과 기술, 상품과 소득이 순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치유농장의 수입원 확대에도 의미가 있다. 체험 프로그램과 함께 농산물, 가공품, 공예품, 교육, 음식, 숙박, 관광 등을 연결하면 하나의 치유자원이 여러 형태의 상품과 서비스로 발전할 수 있다. 이는 치유농업과 농촌융복합산업을 연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도넛경제학은 최근 식품과 농업 분야로도 적용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2026년 6월 11~12일 이탈리아 로마에서는 DEAL과 아메리칸대학교 로마 캠퍼스가 식품시스템에 도넛경제학을 적용하는 워크숍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식량을 공급하면서 지구의 생태적 기반을 지킬 수 있는 ‘Food Doughnut’이 논의됐다. 2025년 말부터 국제 식품 전문가들이 참여해 사회적 기초와 생태적 한계라는 도넛경제학의 틀을 식품시스템에 적용해 온 작업의 연장이었다.
케이트 라워스의 생각을 치유농업에 적용해 보면 치유농장의 가치가 새롭게 보인다. 흙에서 자란 식물이 사람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체험에 사용된 식물은 상품과 공예의 소재가 되며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소득은 농장주와 지역 농가, 주민, 공예가와 가공업체를 연결한다. 이러한 관점은 앞으로의 치유농업이 무엇을 생산하고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할 것인가와 함께, 농장의 자원과 가치가 어떻게 순환하도록 설계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참고문헌
최연우. 2026. 린 마굴리스에게 배우는 공생과 치유농업.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9.9.)
최연우. 2026. 유진 오덤에게 배우는 생태계 관리와 치유농업.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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