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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의 푸념 “의자와 가로등”
  • 기사등록 2010-12-13 16: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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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 의자와 가로등은 객관적으로 제 각각 할 일이 달라 무어라 꼬집어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은연중에 공동운명의 타고난 존재처럼 보여 지기도 합니다.

의자는 굳건한 네다리를 지상에 버티고서 누군가 휴식의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 봉사를 하겠다는 소명의식으로 종일토록 기다려 주인이 나타나면 온몸으로 정성껏 모시다가 원래의 주인이 떠나간 뒤 다른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을 반복 합니다.

가로등은 어두운 밤이 오면 누군가에게 길을 알려주려고 열과 성을 다하여 자신의 몸을 스스로 태워 불을 밝힙니다.

겉으로 보면 하루 종일 기다리는 의자에 비하여 가로등은 어두움이 밀려온 밤에만 활동하기 때문에 덜 힘들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두운 저 먼 곳까지 조금이라도 더 비추려고 애쓰는 순간이 있기에 힘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대로변이나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의 가로등은 그나마 자신의 임무에 보람이 있고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산등성이 가로등은 적막하고 무료할 뿐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면 외롭고 존재의 가치가 희석되어 안타깝기 이를 데 없을 것입니다. 의자나 가로등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직접 돕지는 못하고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결정적인 약점입니다.

의자는 잠시 맡아주는 사람만 있을 뿐 영원한 주인이 없습니다.

의자에 앉은 사람도 이를 송두리째 가지려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세상의 모든 물체가 비록 잠시 동안 누군가의 소유가 되었다 할지라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의자가 선뜻 내주는 자리는 원래 내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세상의 바람과 구름이 흘러가는 촌음만 맡아 두었을 뿐입니다.

법정스님께서도 스스로 만들어 한평생 앉았던 의자만 남겨두고 어디론가 떠나가셨습니다.

무상한 세월이 또 다시 흘러간다면 의자마저 흔적 없이 떠나가 버리고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의자와 가로등의 생리는 누군가 찾아주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는 처절한 외로움이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들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2010. 12. 11. 노르웨이 오슬로의 노벨상위원회에서 수여하는 노벨평화상은 중국의 “류샤오보”가 수상하기로 했지만 정작 수상자의 불참으로 빈 의자가 대신하여 수상하였습니다.

잠시 동안 일지라도 그 의자의 주인은 중국의 반체제 인사이고 변호사이면서 민주화운동가로 303인의 “08헌장” 서명운동의 주역이었으며, 천안문 사태에 국가전복죄로 11년의 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인 “류샤오보”의 공간임을 세계인이 인정하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주인이 앉아 있었던지 아니든지 간에 의자가 빛나는 순간임에는 틀림이 없었고, 노벨평화상을 보듬어 안은 의자는 고귀하게 보이기도 하였지만, 결국에는 수상자를 기다리는 모습이 약간은 허전해 보였습니다.

어쩌면 아무런 생명도 없는 의자는 살아 숨 쉬고 부대끼는 우리들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 부족한 인간들은 의자와 가로등이 무작정 기다리는 것처럼 인고의 아픔으로 항상 무언가를 간절하게 갈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가슴속 깊이 기다리고 있는 대상들을 나열해보면, 부모, 형제, 처, 자식, 남편, 구원, 희망, 사랑, 연인, 제대, 일자리, 버스, 식사, 차례, 119와 구조대, 안식, 투표권, 봉급날, 적금만기일, 결혼일, 출산일, 귀국일자, 휴가, 출소일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신 윤복이 그려놓은 오래된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은 자꾸만 뒤 돌아 보며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농부는 곡식이 익어가기를 기다리며 연극 무대에 오른 연기자는 관객을 기다리고 시한부인생은 조용히 죽음을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문밖에 나가서 오늘 아니면 내일 쉼 없이 기다리다 갑자기 흰머리의 할머니가 나타나는 중국영화의 오버랩은 때로는 사나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 30년이 넘게 처자식을 버리고 객지로 방황하던 나그네가 마지막으로 용서를 구하면서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 자신을 받아주겠다면 그 징표로 정해진 날의 집 앞 싸리문에 하얀 수건을 걸어두도록 소식을 전합니다.

정작 30년간의 애증을 뒤로하는 비련의 여인은 더 이상 탈색될 것이 없는 하얀 수건을 싸리문에 걸어둡니다.

때 아닌 바람이 불어 문제의 수건을 멀리 날려 보내 그토록 그리웠던 세월 처음으로 집을 찾은 나그네로 하여금 피눈물을 흘리면서 발길을 돌리게 하고, 멍들어 버린 가슴으로나마 보고 싶었던 사람과의 이생에서 극적인 상봉을 끊어버리는 슬픔은 의자와 가로등이 보여준 기다림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황인 것입니다.

주변에 평생 동안 본처를 버리고 멋대로 세상을 살다가 급기야 말년에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고 자신이 헌신짝처럼 버렸던 본처에게 의탁하여 살아가는 가엾은 영혼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처자식에게 무어라 할 말도 없는 듯한 초점 잃은 눈망울로 여생을 살아가다 정작 바람 따라 떨어져가는 낙엽처럼 조용히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떠나보내는 영혼은 동구 밖에서 우는지 웃는지는 모를 미묘한 표정으로 “좋은데 가서 잘 살라”고 당부하고 떠나가는 낡은 목선을 향하여 네 차례 절을 하였습니다.

인간의 만남과 이별이 이토록 허무할 줄을 정말 몰랐습니다.

문득 우리는 역무원도 없는 시골 역사를 기차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뒤 잡초가 우거진 사이에 자리 잡은 의자와 가로등을 보는 것 같습니다.

황혼이 무르익은 거대한 나무 밑에서 치마를 바람에 날리면서 서쪽 하늘 노을을 뚫어져라 지켜보는 여인이 기다리는 존재가 사랑하는 연인이었다면 기다림의 끝이 되어갈 것이고,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면 기다림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진실로 사랑하였지만 아쉬운 이별 뒤에는 비어버린 의자만이 남고 옆에서 가로등은 우는지 조는지는 몰라도 껌벅이고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상대방의 첫사랑이 아니었을 지라도 마지막의 지극한 사랑이기를 고대하는 의자와 가로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포용하기 힘들다고 느끼면 차라리 온 세상에 차별 없이 오로지 한 가지 색깔인 무욕의 첫눈을 지천으로 뿌릴 것입니다.

세찬 바람에 떨어진 낙엽마저 흔적이 없어지고 메말라 비틀어진 가지에 생각해보지도 못하였던 눈꽃이 피고 오래되어 묵은 의자에는 소복하게 그윽한 정이 쌓여가면서 가로등은 이리저리 날리는 사랑의 혼백들 그림자를 쫒아 그리움과 기다림의 향연을 마음껏 펼쳐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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