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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의 “바람개비”
  • 기사등록 2011-03-07 17:2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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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대로 멈추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어디서부터 시작하였는지는 모르지만 뒤에 것이 앞에 것을 밀면, 보이지는 앉지만 알게 모르게 밀려가다가, 보이는 무언가를 무심코 끌어가기도 합니다.

끌려가거나 달려가는 것들은 움직이는 동안에 주변의 물체들의 모습을 수시로 변형시키는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바람이 불어오면 구름이 흘러가고 지상에서는 나뭇잎이나 풀잎들이 그대로 순응하여 흔들립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바람의 모습을 교묘한 날개 네 쪽을 접어 두는 일로 하여 끊임없이 돌아가면서 그 실체를 느낄 수 있도록 신비한 마술을 부려 놓았습니다.

돌고 돌아가는 바람이나 구름만이 아니라 티베트 고원에 피어나는 불심을 보면 정말로 놀랍고도 또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문명의 발달에 의하여 자동차로 하루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 이지만, 성지를 향하는 불타는 의지와 신앙의 힘으로 오체투지를 하면서 몇 년의 세월을 마다지 않는 고행과, 옆에서 리어카를 끌어 고난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신앙심이 어디에서 오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잘살고 못살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겉으로 들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가슴속에 비치는 진실한 행복의 그림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때가 낀 손으로 황금색이 빛나는 기구를 쉬지 않고 돌아가며, 돌리고 돌리는 모습은 인생살이 끊임없는 고행의 이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힘들다 못해 각박하여 내 몸 하나 보살피기에도 버거운 현실의 세계를 극복하여 무언가를 애써 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염원과 자긍심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피어나고, 강물이나 바다와 같은 생각들을 쉼 없이 단련하여 세상에 한 가닥 빛을 던진 선현들의 발자취 또한 그 끝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많은 성현들 중에서도 1762. 음력 6월 16경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양반이자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23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쟁언” “사헌부 지평”을 거치면서 유형거와 거중기를 개발하여 수원성을 쌓는데 공을 세우고, 경기 암행어사로 나아가서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대변하여 지방 관리의 폭정을 고발하여 처벌하는 등 정조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분이 계십니다.

한 때는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아 34세의 나이로 정3품 당상관 동부승지에까지 올랐지만, 23세 때 사돈인 광암 이벽을 만나 천주교에 대한 소개를 받고 그 이론에 심취하여 관련 서적을 탐독하기도 했으나 곧 손을 떼고 학업에 정진 하였음에도,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소론과 남인사이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소론의 무차별 공격 대상이었던 남인들에 대한 죄목은 근대적인 서양문물인 서학과 함께 천주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인데, 선생님께서는 포항에 있는 장기로 유배를 가고, 셋째형 정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정약전은 완도 신지도로 유배를 갔다가, 9개월이 지난 뒤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또다시 조사를 받고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과 정신적인 충격을 안은 채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무려 18년여에 걸친 길고 긴 유배생활 동안 다른 사람 같았으면 술이나 마시고 세월을 한탄만 하였을 것인데,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절개로 무려 230여권에 달하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저술을 남겼으니 하늘을 놀라게 하는 기백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올바른 방향으로 돌렸던 가히 초인적인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남기신 모든 저술과 사상에 대하여 일일이 그 뜻을 새겨들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 중의 만 분지 일이라도 깨우치는 혜택을 누린다면 더 없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1822년 회갑을 맞아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서도 “육경과 사서로 몸을 닦게 하고 일표이서로써 천하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하고자 함이었으니 본과 말을 갖추었다” 라 하고 유배지의 쓸쓸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술 작업에 매진하면서도 가슴속에 오직 하나로 간직한 뜻은 “한 사람만이라도 책에 대한 값어치를 알아주는 것으로 족하다” 고 하셨으니 진리의 바닷가를 서성이는 후학들로서는 더 없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당시 천주교를 믿는 자는 역적의 형벌로 다스리겠다는 추상같은 명령에도 불구하고 형 정약종이 천주교 관련 문서와 물건 등을 다른 곳으로 옮기다가 관원에게 적발이 되어 붉은 옷을 입은 죄수들이 길을 메울 정도로 많았다 하였는데, 선생님은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다행히 목숨만은 부지하여 1801년 음력 11월 하순경 추운 겨울인데도 유배지 강진에 도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서울에서 천주교 문제로 피바람이 불어 차가운 북서풍을 맞고 내려온 분을 위하여 목숨의 위협을 무릅쓴 채 가까이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매서운 겨울바람과 차가운 냉대를 무릅쓰고 강진읍 동문 밖 주막의 노파가 내어준 허름한 방 하나에 거처를 정하고는 “북쪽 바람 눈 휘몰 듯이 나를 몰아 붙여/ 머나먼 남쪽 강진의 밥 파는 집에 던졌구나” 라는 내용의 시를 짓고, 누추한 뒷방을 “사의제”라 이름하고서는 “예기”의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생각이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하면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엄숙해야 하니 곧바로 엄숙하게 해야 한다./ 언어는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그치도록 해야 한다./ 동작은 두텁고 무겁게 해야 하나 못하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핍박 받는 백성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 의하여 그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고자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를 저술 하였습니다.

"목민심서“의 서두에 ”옛날에 순임금이 요임금의 뒤를 이어 천하를 다스릴 때는 12목을 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목민케 하였고, 문왕이 정사를 돌볼 때는 사목을 두어서 목민케 하였으며, 맹자가 평륙으로 갔을 때 추목함을 목민에 비유하였으니, 백성을 기르는 것을 목이라 일컫는 것은 성현이 남긴 뜻인 것이다.

따라서 군자의 학문이란 반은 수신하는 것이고, 나머지 반은 목민하는 것이다“고 설파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아들을 낳은 지 사흘 만에 군적에 등록되어 군포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장이 목숨처럼 아끼던 소를 끌어가 버리니 자신의 생식기가 죄라고 하여 제거하는 현실을 목도하고는 “애절 양(哀絶 陽)이라는 시를 지으셨습니다.

“갈밭의 젊은 아낙네 울음소리 그지없어/ 관청 문 향해 울부짖다 하늘보고 통곡 하네/ 군인 남편 못 돌아온 거 있을 법도 하다지만/ 예부터 남절양은 들어보지 못했어라/ 시아버지 장례 치르고 갓난아기는 젖 먹이는데/ 3대의 이름이 군적에 올랐다네/ 달려가 호소해도 범 같은 문지기 버텨 섰고/ 리정이 호통치며 남은 소마져 끌고 갔다네/ 아이 낳은 죄라고 남편이 한탄하더니/ 칼 갈아 들어간 뒤에 방에는 피가 흥건하여라”는 내용입니다.

이조 500년의 역사를 말아 먹고 만년의 역사를 지켜온 민족의 생명줄마저 팔아먹은 탐관오리들과 매국노들에 대한 분노가 솟구침은 어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백성들을 향하여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바람이 자나가기 전에 풀잎이 알아서 먼저 넘어졌다”는 혹세무민을 거듭하였습니다.

선생님의 타들어가는 안타까운 마음이 목전에 보이는 듯 합니다.

두 살때 완두창(천연두)을 앓았다가 왕족이면서도 중인의 일을 할 수 없다는 나라의 법을 극복하고 천연두 치료의 최고의 한의사였던 “이헌길”의 치료를 받아 극적으로 완치가 되었습니다.

당시 명의인 “이헌길”은 마마의 치료법을 알고 이를 치부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치료에 전념하다 손이 부족하면 그 처방전을 모든 사람들에게 불러주어 스스로 치료를 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이헌길 선생님의 뜻이 어린 다산의 가슴에 저절로 이전되어진 것으로 보여 집니다.

선생님은 어릴 때 마마를 앓은 후유증으로 눈썹이 세 줄로 갈라지는 흔적이 남아 ‘삼미자’라 하였다 합니다.

어찌되었든 천연두의 공포를 극복하여주신 고마움을 백성들에게 돌려주기 위하여 이헌길에게서 책을 빌려 근본 원인을 탐구하고 중국의 관련서적 수십 권을 참고하여 초고를 정리하고 다섯 차례나 고쳐 “마과회통” 12권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책의 서문에 “의원이 의원을 직업으로 삼는 까닭은 이익을 위해서인데 몇 십년 만에 한 번씩 발생하는 천연두 치료로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 직업으로 삼아도 기대할 이익이 없는 데다 환자를 치료하지도 못하니 부끄러운 일이다”고 이익에 매달리는 의원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대책 없이 목숨을 버리는 백성들과, 살아도 흔적이 심하게 남는 사람들의 고통을 감싸려고 초정 박제가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결국에는 천연두의 예방에 필수적인 종두법을 완성하였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목민심서를 통하여 백성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해소하려고 뼈를 깎는 진통으로 책을 저술하면서 탐관오리의 흉악한 소행을 들추어 낸 것도 있지만, 진실로 큰 뜻을 지녔던 선비들의 선행도 아울러 소개를 하였습니다.

‘여공저’가 고을을 다스릴 때, 오경이면 일어나서 촛불을 밝혀 놓고 책상위의 서류를 살피며, 동이 트면 청에 나와서 백성들의 송사를 처결하고, 물러나 한가한 때에도 누구든지 만나자고 하면 구애하지 않아 고을에서는 지체되는 사건이 없었으며, 정이 위로 통하고 무릇 여섯 고을을 다스렸는데도 모두 한결 같았다 합니다.

‘장구성’이 진동 판관이 되었는데 관사를 성심으로 연구하면서 벽에다 “이 몸이 진실로 하루라도 한가하다면 백성들이 한없는 괴로움을 당한다” 라는 문구를 써 놓고 근무를 하였다 합니다.

‘배 도“라는 사람이 중서성에 있을 때 손님과 술자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인장을 잃어버렸다는 보고를 받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뒤 늦게 인장을 찾았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대응을 하지 않아 누군가 이유를 물은 즉 ”필시 아전이 인장을 훔쳐서 문서에 찍었을 것인데 급하게 서두르면 물이나 불속에 던져버릴 것이나, 늦추어 주면 제자리에 갖다 놓을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고 하였답니다.

‘양 진’이 형주자사가 되었을 때 왕 밀이라는 사람이 깊은 밤을 틈타 은밀히 황금 10근을 품고 바치면서 “밤이 깊어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 하자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거절하였다 합니다.

‘정 선’이 말하기를 “옛날 현령 중에 지극히 청렴한 자가 있었는데 서울서 공문이 이르게 되면 관촉을 켜놓고 봉함을 뜯어보다가 집에서 온 글월이 있게 되면 관촉을 끄고 사촉으로 글을 본 뒤에 다시 관촉을 켜게 하였다. 비록 굽은 것을 바로잡는 행위로서는 너무 지나쳤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풍속을 격려하는 좋은 예인 것이다”고 하였답니다.

‘정 붕’이 청송부사가 되었는데 재상 성희안이 잣과 꿀을 요구하매 글로써 “잣나무는 높은 봉우리 꼭대기에 있고, 꿀은 초가의 벌통에 있으니 태수가 무슨 수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자 부끄러워 잘못을 사과 하였다 합니다.

양나라의 대부 ‘송 취’가 현령으로 초나라와 경계를 하여 오이를 심었는데, 초나라의 오이가 물을 게을리 하여 잘 자라지 않으니 초나라에서 밤중에 몰래 작물에 해를 입히자, 밤중에 사람을 시켜 오히려 초나라의 오이와 함께 물을 대어 주어 결국에는 양쪽 나라의 오이가 잘되었는데, 나중에 초나라의 왕이 이 사실을 알고 상을 내림과 함께 양나라 임금과 사이좋게 지냈다고 합니다.

‘황 진기’라는 사람이 영종 무신년에 망명을 하였는데 90년이 지나버린 후에도 관아에서 매달 추적보고를 하고 있었는데, 이는 관청의 사무를 번잡하게 하는 일로 없애 버려야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유 곤’이 강릉령이 되었는데 고을에 큰불이 일어나자 즉시 불을 향하여 절을 하였더니 풍향이 바뀌어 지며 불이 곧 꺼지고, 송나라 때 ’사비‘라는 사람이 자신이 다스리는 고장의 강둑이 넘치는 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의 피하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호상을 가지고 둑 위에 앉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물러갔다고 합니다 .

모든 재해는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 맞지만 목민관의 지극한 마음이 있다면 재해도 극복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인 것으로 보여 집니다.

목민관이 비록 청백하고 경학에 뛰어나지만 아랫사람의 관리에 소홀히 하면 오히려 청백하지 못한 수령보다도 도둑을 여섯으로 늘리는 결과가 되니 더욱 올바르지 못한 처사라고 하였습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하여 청백리로 표창을 하는 제도가 있었다는데 수만 명의 관리들 중 태조로부터 성종 사이에 45명, 중종으로부터 선조사이에 37명, 인조로부터 숙종 사이 28명 도합 110여명의 청백리가 나왔다고 합니다.

‘신 응시’라는 사람이 호남 안찰사가 되었을 당시 남원의 한 백성이 독실한 불교 신자로 만복사에 모든 재산을 시주하였는데도 가세가 기울어 죽고 그 아들마저 구걸하며 지내는데, 절에 시주한 전지를 돌려 달라는 내용의 소장을 접수하고서는 “복을 구하기 위하여 시주를 하였는데도 부처의 영험이 없었다면 전지는 주인에게 돌려주고 복은 부처에게 바치라”는 판결을 내리고,

송나라 때 ‘고헌지’는 건강령이 되었는데 소를 도둑질한 자와 원주인이 서로 자신의 소라고 다투니 소를 풀어 놓아 소가 스스로의 집으로 찾아가는 것으로 판결을 내렸다 하는데 목민관의 지혜가 번득이는 사례인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15세가 되던 해에 한 살 연상인 풍산 홍씨와 결혼하였는데 힘든 과거 공부와 분주한 벼슬살이로 부부간의 정을 미처 나누어 보지도 못한 채 40세 중반에 세 살배기 막내아들을 품에 안은 아내와 헤어져 귀향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일년뒤 막내아들의 요절을 맞았던 두 사람의 가슴에는 얼마나 커다란 비통의 슬픔이 밀려왔을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을 뿐입니다.

10여년의 유배 생활 동안 홍씨는 자신이 시집 올 때 입고 온 빛바랜 여섯 폭 다홍치마를 조금의 위안이라도 드리고 싶은 애틋한 마음에 유배지의 남편에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부인이 보내준 옷을 네 첩으로 재단하여 두 아들에게 교훈의 글을 적고 딸에게는 매화에 새를 그려 넣어 시 한수까지 얹어 간곡한 정을 듬뿍 담아 한 차원 승화된 선물로 하여 집으로 보냅니다.

“파르르 새가 날아 뜰 앞 매화에 앉네/ 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찾아 왔으니/ 여기에 둥지 틀어 너의 집으로 삼으렴/ 만발한 꽃인지라 먹을 것도 많구나” 아름다운 선물을 받은 막내딸은 한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가슴 깊이 느꼈을 것입니다.

평생을 통하여 가정생활의 안락함을 느껴보지 못하다 말년에서야 마주친 아내는 꽃처럼 예쁘던 홍안의 얼굴은 이미 어디 두고 거친 세파에 시달린 주름살이 깊었을 것입니다.

지아비와 부모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선생님의 회환과 인생의 아픔이 가슴속 절절이 베이며 노년을 꾸려가던 중, 방년 16세의 꽃다운 나이 아내로 맞이하였던 그때로부터 꼭 60여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버린 바로 그와 같은 날 “육십 평생 바람개비 세월이 눈앞을 스치는데 무르익은 복숭아 봄빛이 마치 신혼 때 같아라” 는 시귀를 남기고 마지막 이승에서의 고단한 숨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비록 세상을 향해 수많은 서적을 남기고 후세의 귀감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정작 선생님의 인생역정이 너무나도 기구하여 우리 민초들의 가슴에 쓰리도록 절절한 여운을 남기고 있으며,

또한 우리들 간단없는 인생살이가 아마도 부질없이 돌아가는 바람개비의 인생이 아닌지 새삼 되돌아 반추의 기회로 여겨지는 순간 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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