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 신농의 나라 염제국은 후손으로 2대 제괴, 3대 제승, 4대 제명, 5대 제직, 6대 제리, 7대 제애, 8대 제유망까지 이어지면서 양잠이 활발하였던 공손의 부족을 합병하였는데, 유망이 공손의 아들 헌원이 재주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딸 뉘조의 배필로 삼았다.
뒷날 염제국이 치우천왕의 공격으로 쇠퇴하자 헌원이 426년간 존속한 장인의 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하여 자신의 계열로 흡수하여 버렸다.
웅녀군의 후손으로 여(黎)라고 하는 이가 처음으로 단허에 책봉 받아 왕검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나아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써 귀화하는 자, 천여 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 지나 신인(神人)왕검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이 되었다.
섭정하신지 24년에 선왕께서 전쟁 중에 붕어하시니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곧 나라의 인물들을 불러 앞으로는 백성들의 뜻을 물어 공법을 만들고 이를 천부라 할지니 지극히 존중하여 아무도 이를 어길 수 없도록 하였다.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으로 나누어 관경을 만드시고 진한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시고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하고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지내는 곳인데, 후인들은 왕검성이라 하였다.
단군께서는 ‘웅백다’를 봉하여 마한이라 하면서 달지국에 도읍하고 백아강이라 불렀다.
마한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 지내니 천왕께서 조서를 내려 가로대, 사람이 거울을 보면 그 곱고 미운 것이 저절로 나타나고, 백성들이 임금을 보면 그 치란은 정치에 나타나고, 거울을 보면 반드시 형체를 보니 임금을 보면 반드시 먼저 정치를 보느니라.
단군께서는 치우천왕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게 세상에 소문난 ‘치두남’이라는 자를 불러 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순임금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 한 해에 험독, 영지, 탕지, 용도, 거용, 한성, 개평, 대방, 백제, 장령, 갈산, 여성의 12개성을 쌓았다.
무진 원년(기원전 2333년)에 바야흐로 신시의 다스림이 시작되었을 때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과 골짜기에 두루 퍼져 살며 풀잎으로 옷을 해 입고 맨발로 다녔다.
신시개천 1565년 상월 3일에 오가의 우두머리로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 터에 자리를 잡아 삼신님께 제사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
마침내 하늘의 뜻을 받들어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희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에겐 군대를 관장케 하였다.
정사 50년(기원전 2284년)에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 수가 없어 풍백인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 강을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무오 51년 운사 배달신에게 명하여 강남의 장정 8,000인을 선발하여 강화도에 삼랑성을 짓고 마니산에 제천의 단을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이 그것이다.
신유 54년 3월에 천왕은 몸소 마리산으로 행차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단군왕검은 제요도당(요임금)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군대의 관장)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순임금의 부자 형제가 다시 돌아와 한집에서 살게 되었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공경스럽게 효도함을 앞세우게 되었다.
순(요)임금의 당나라가 9년 홍수를 당하여 그 피해가 만백성에 미치니 단군왕검은 갑술67년(기원전 2267년)에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임금과 약속하고 초청하여 도산에서 만나게 하였다.
도산으로 가는 길에 번한의 치두남의 아들 낭사가 세운 낭사성에서 반달동안 머무르며 민정을 청문 했다.
순임금은 역시 사악(제후들을 통솔하는 우두머리)을 인솔하고 치수의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하였다.
순임금이 사공인 우를 파견하여 우리 오행치수의 법을 배우게 하니 태자 부루가 마침내 천자의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을 보이면서 ‘이것을 패용하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 할 것이다.
또 황거종의 보물이 있는데 험요의 물을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크게 공을 이룰 지니라’고 하니 우사공은 삼륙 구배를 하고 ‘천제 아드님의 명을 게으름 없이 업으로 삼아 우나라 순임금의 정치를 힘써 도와 삼신께 보답함은 크게 기꺼운 일로 반드시 그리 하리이다.’고 물러나 마침내 홍수를 바로 잡았다.
태자는 구려를 도산에 모으고 우나라 순임금에게 명하여 곧 우공의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우를 낭야성(산동성 제성현)에 두어서 이로써 구여분정의 뜻을 정하였다.
서경에서 말하는 바의 “동순하여 망제를 지내고 마침내 동후를 찾아뵙다”라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진국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는 곳이므로 5년마다 순수하는데 낭야에 한 번씩 이르러 순의 제후는 진한에 조근하기를 네 번 이었다.
서경의 순전 제2장 원문에 ‘사근동후(肆覲東后)’의 覲자는 “아랫사람이 웃어른을 찾아 뵌다”는 뜻으로 “동쪽의 천자를 찾아 뵙고” 임에도 ‘동쪽의 제후들을 접견하여’라고 교묘하게 바꾸어 놓았다.
경자 93년(기원전 2241년)에 단군께서 버들 궁궐에 계셨는데 단목이 무성한 그늘에서 곰. 호랑이와 더불어 노닐며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셨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며 고기잡이를 가르치니 백성들은 남는 물건을 나라 살림에 보태었다.
시월 상달이면 하늘에 제사 지내고 백성들 모두 기쁨에 넘쳐서 환호하며 백환무(빙 둘러서서 추는 춤)를 추며 스스로 즐겼는데, 단군님의 교화는 온 누리를 가득 덮어서 멀리 탐랑(제주도)에까지 미쳤으며, 점차로 멀리 퍼졌다.
이에 천하의 땅 삼한이 오가 64족을 모두 포함 하였다.
이해 3월 15일 단군께서 봉정에서 붕어하시니 재위 93년에 천수 130으로 교외 10리쯤 떨어진 땅에 장사 지냈다.
백성들은 마치 부모님 돌아가신 듯 단군님의 기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앉아 경배하며 생각하여 마음속에서 잊지 못하였다.
태자 부루가 2세 단군에 올라 신축 원년(기원전 2240년)에 백성과 더불어 함께 산업을 다스리시니 한 사람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는 자가 없었다.
봄가을로 나라 안을 두루 살펴보시고는 하늘에 제를 올려 예를 다하였다.
여러 왕들의 잘잘못을 살피시고 징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도랑을 파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며 농사짓고 뽕나무 심을 것을 권장 하였다.
순임금이 유주 영주의 두주를 남국(연나라, 구이중 남이)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단제 께서 병사를 보내 이를 징벌하여 그 왕들을 모두 다 쫒아내시고 동무와 도라 등을 그곳의 제후로 봉하여 그 공을 표창 하였다.
신시이래로 하늘에 제사 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크게 모여 함께 노래 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를 부르며 조상에 대해 고마워 하였으며 신인이 사방을 다 화합하는 식을 올리니 이게 곧 참전의 계가 되었다.
임인 2년(기원전 2239년)에 단제 께서는 소련, 대련(부모의 상을 잘 치른 하늘이 내린 효자(천종지효의 주인공))을 불러 다스림의 길을 물었는데, 이전에는 다섯 달에 그치던 부모의 상을 3년이 넘도록 치러 오래 될수록 영광된 것으로 하여 공자도 칭찬하였으며,
무릇 부모에게 효도함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이익 되게 하는 근본이니 온 세상에 두루 알려 표준으로 삼게 하였다.
계묘 3년 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를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도록 하였다.
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되도록 하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하였다.
경술 10년 4월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하였다.
임자 12년 신지인 귀기가 칠회력과 구정도(밭을 나눈 도면)를 만들어 바쳤다.
무술 58년(기원전 2183년)에 단제 께서 붕어 하셨는데 이날 일식이 있었다.
산짐승도 무리를 지어 미친 듯 산 위에서 소리를 질렀고 백성들은 심하게 통곡 하였다.
백성들은 집안에 땅을 골라 단을 설치하고 흙 그릇에 쌀과 곡식을 가득 담아 단위에 올려놓았다.
이를 부루의 단지라 부르고 업신으로 삼았으며,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하여 전계라고도 불렀으며, 업주가리라 하였으니 바로 사람과 업이 함께 완전하다는 뜻이었다.
이맥의 삼한관경본기, 이암의 단군세기, 서경,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