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9. 28. 새벽. 목포에서 진도군 조도면 관매도로 향하는 유일한 선박인 신해 호를 향하여 수상한 두 사나이가 손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어둠속을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앞에 선 사람과 뒤에 줄을 잡아당기며 따라가는 사람이 올망졸망한 가재도구들에 가려 도무지 형상을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경사가 심한 철다리를 건너는 동안 뒤따라가던 사나이는 여지없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줄을 잡고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그 많은 짐을 신해 호 앞 공간에 차곡차곡 쌓는데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였고, 둘이는 아무 말 없이 선술집에 들러 아침부터 술잔을 기울였다.
앞에 계신 분은 이제는 하늘나라에 집을 지으신 병윤 형이었고 뒤따라가던 사나이는 불초한 소생이었다.
그날 9시경 출발한 배는 해남 부근 산천을 이리저리 지나고 진도의 크고 작은 섬들과 마을을 느린 비디오처럼 보여주며 하염없이 가고 있었는데, 오후 2시 반경에서야 겨우 관매도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93년 제주도에서 시작된 이산의 연장선인 관매도 생활이 시작되었고, 초등학교 2년 철부지 딸과 유치원생 아들, 허리가 온전치 못하였던 장모님과 처를 남겨두고 다음날 새벽 진도에 있는 팽목항으로 되돌아 나서는 발길에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달랠 길이 없었다.
모두가 내 부덕의 소치였다.
이후로 교통수단이 원만하지 못하여 이따금 토요일 근무를 마치면 진도의 팽목 항으로 숨 가쁘게 달려 상조도까지 가는 철부도선에 승선하였다가, 올망졸망한 짐들과 함께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배에서 내려, 또다시 택시를 타고 읍구 선창으로 이동을 하였다.
그곳에서 전화를 하여 관매도에서 운행하는 개인 배를 불러 섬으로 가는 여정이 말이 쉽지 물때가 맞지 않으면 짐을 지고 몇 개의 바위를 타고 넘어, 오가며 짐을 실어내려야 했다.
운전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몇 차례나 팽목까지 데려다 준 동생들과 병윤 형은 너무나 고마워 지금까지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정작 당사자인 조 여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훗날 관매도의 생활이 너무도 즐겁고 보람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몇 주 정도의 간격으로 이따금 찾아간 관매도의 풍광은 정말 환상적 이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백사장과 해안선을 따라 켜진 가로등과 평균 수령 400년인 송림, 들어서는 뱃길에 늘어선 기암괴석, 주변의 각흘도, 영등도, 관매초등학교, 눈 덮인 설경, 2구 선창, 오가는 고깃배와 갈매기 등은 한없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밤 깊은 해수욕장에서의 방게 잡이. 백사장을 몽둥이로 때려 모래 속에 숨어있던 것을 자극하여 깜작 놀라 물기둥을 뿜어 올리면 호미로 모래를 파헤쳐 잡아내는 모시조개, 2구 바닷가 바위틈에 자리 잡은 청색 게 잡이 등은 너무도 재미있는 추억이었다.
다음해 여름철에는 관매도 전체가 외부 관광객으로 가득 찼었는데 마을 주민 만나기가 오히려 힘들던 시절이었으며, 조 여사는 환자들 돌보느라 동분서주 하면서 아이들 점심도 먹이지 못하였고, 아예 애들도 해수욕장에서 하루해를 꼬박 보내고 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들었다.
그해 해수욕장 목욕탕에서 만취한 상태로 실신하여 심장 박동이 멎었던 20대 초반의 아가씨는 용케도 조 여사의 심폐소생술에 의하여 극적인 삶을 연명하였고, 옷까지 빌려 입고 육지로 나간 뒤 소식이 아예 끊어졌다.
마침 동문 권투부 후배들이 야영 훈련을 왔다 하여 나름대로 음료수와 포도를 비롯한 과일 등을 고생고생 하면서 가지고 갔었는데, 딸이 햐얀 원피스를 입고 고무 줄 놀이를 하고 있었고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 했다.
강렬한 햇볕과 바닷물에 의하여 온몸이 까맣게 착색이 된데다 눈동자만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데 무어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만감이 교차하였다.
정작 식구들 몫의 과일 등은 챙기지를 못하였는데도 딸이 다짜고짜 가져다 놓은 포도를 보고 먹으려고 손을 내밀자 큰소리를 쳤더니 영문을 모른 채 눈물을 펑펑 흘리며 서럽게 울었다.
나의 답답하였던 지론은 포도 한 송이라도 건드리지 않고 아낌없이 그대로 주어야 공덕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권투부 야영 훈련장에 캠프파이어가 있어 온 가족이 참석하였고 여기저기 포도가 굴러다니고 있는데도, 딸은 자존심을 세워 끝내 포도를 먹지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되돌릴 수 없는 후회로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
관매도는 그 풍광만큼이나 마을 사람들 인심 또한 후하다.
지금은 모두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지만 옹기종기 모여 톳, 미역, 멸치 등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한 가족임에 틀림이 없다. 작업이 끝나고 말없이 건네주는 미역 몇 가닥과 멸치 바가지는 얼마나 정겨운 선물인지 모른다.
관매도 주민으로 살았던 시절만큼 우리 가족들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쌓여 있는데 정겨운 사람들의 애환과 사연을 모두다 찬찬히 옮기지 못하는 데에는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그 시절 섬에서 만나는 주민들은 상당수가 고혈압과 신경통, 과로로 인하여 형편없이 악화된 건강으로 근근이 하루를 지탱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중 연로하면서도 보살필 가족조차 없었던 독거노인으로 장산평 할머니가 있었다 한다.
건강 상태가 열악함에도 이따금 술 한잔을 걸치면, 객지에 나간 아들과 딸들이 하루가 멀다 않고 전화를 해주고, 자식들이 보내준 음식들이 냉장고에 잔뜩 들어있으며, 용돈도 매달 보내주어 걱정이 없다고 늘상 풍성한 자랑을 추석에 올리는 차례 상 못지않게 늘어 놓았다 한다.
정작 몸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가보면 불기도 없는 찬방에서, 한잔 술에 진도아리랑을 걸판지게 부르던 호기와 허풍은 사실 할머니의 희망 사항임을 알게 되었다 한다.
유일한 혈육인 아들은 해남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도 못하고, 며느리는 행방조차 모르고,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손주 놈은 조도에 있는 외삼촌 집까지 왔다 갔다는 말만 들었을 뿐 종내 무소식이었다고 한다.
어차피 찾아가 돌볼 수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자신이 죽으면 찾아갈 가족조차 없을 아들을 걱정하며 갈고리로 변해버린 손으로 눈물을 훔치다가 조여사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하였다.
그해 장산평의 할머니는 추위와 질병으로 끝내 이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남아있는 유일한 직계혈육으로 손주를 기다리며 하루를 연기하였던 할머니의 주검이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고 삶의 터전이 되었던 관매도의 한줌 흙으로 돌아간 뒤에야, 손주를 실은 무심한 철부도선은 뒤늦게 도착을 하였다.
관매도 2구 마을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가다 보면 맨 마지막 집에 이르면 평생을 처녀로 지내다 늙어버린 소경 할머니가 계셨는데, 한겨울에도 구들장에 불도 피우지 못하여 가마솥이 항상 차가운 상태였고, 어디를 갔는지는 몰라도 출타한 시간이 많았다 한다.
방안에 누워있던 할머니의 눈과 코에는 파리 등이 까맣게 붙어있어 조 여사는 파리 잡이 끈끈이를 사다가 곳곳에 붙여 두었다.
소경 할머니가 젊었을 무렵에는 그로 인하여 2구 마을에 애환도 많았다지만, 그토록 고단한 세월을 꾸려가던 할머니는 끝내 자신의 질긴 삶의 끈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어느 날 문지방에 목을 매어 스스로 관매도를 떠나고 말았다.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왔다가 떠가는 돛단배와 같이 할머니는 수도 없는 애달픈 사연을 가슴에 묻어두고 관매도의 한줌 흙으로 돌아간 것이다.
창주는 걸음걸이가 불안하여 자꾸만 넘어지고 넘어졌다 일어나면서 참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는데, 창주가 손수레를 끌고 가면 아예 손수레가 오히려 창주를 밀고 가는 형국이 된다.
말을 온전하게 할 줄 몰라 손짓 발짓으로 의사를 소통하고 수시로 조 여사에게 도움을 청하였다는데, 어머니가 아프거나, 돼지 밥을 주어야 할 때, 누나에게 온 편지를 읽어 달라는 부탁이 태반이었다.
창주가 예쁜 마음에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면 그 뜻을 오해하거나 두려움에 아이들이 창주에게 돌을 던져 다치기도 하였는데, 귀에서 피를 흘리는 창주가 치료를 받는 장면을 목격하고 나중에서야 가해자가 나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어린 딸을 설득하여 창주와 화해를 시키는데 비록 말은 못하지만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마음은 하늘로부터 내리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에서 지냈던 세월이 어느 듯 15년여를 넘어가는 시점에서도 지나간 날들의 추억이 짜릿하게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은 무슨 미련이 부리는 조화일까.
앞으로 기약 없는 세월이 흘러간다 하여도 말없는 청산은 남해의 외딴섬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은 끊임없이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할 것이다.
백년도 채 못가는 인생고개 허위허위 넘어가다 정들었던 사람들과의 안타까운 이별도 없고, 아끼고 사랑했으면서도 사소한 오해로 등 돌리고 살지 않는 그 비법을 관매도는 하마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