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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벽을 쌓은 할머니의 한 목포보훈지청 무안보훈도우미 김혜정 2008-10-20
김승룡 ksy0767@hanmail.net
 
어느 화창한 봄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짐을 챙겨 어르신들 뵐 기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보훈도우미를 시작한지 이제 석달째인 신참이지만, 평소 어르신 돌보는 일을 희망해서 준비해왔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어르신 댁을 찾아갔다.

내가 케어를 하는 어르신 중에 유족 세상과의 접촉을 멀리하시며 혼자만의 세상을 살고 계신 분이 있다. 이날 도로 양쪽엔 가로수에서 풍겨나오는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고 룰루랄라~~콧 노래를 부르며 차를 몰고 작은 농로를 지나 어르신 댁에 도착하니 어젯밤에 어르신 기일이라며 순천에 사시는 조카딸이 와 계셨다. 어르신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할머니의 한 많은 인생 보따리를 풀어 놓으셨다.

열일곱의 곱디고운 나이에 보국대(정신대)에 가지 않기 위해 할머니는 남편과 결혼을 하고 남편은 곧바로 군대에 가셨다고 한다. 길고 긴 시간이 지나고 어르신은 군대에서 제대를 하고 경찰에 들어가 함평 대동지서에서 근무를 하셨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고, 얼마 후 남편의 전사 소식을 시댁을 통해 뒤늦게 접하게 되었고, 남편이 사망했을 때 바로 알았으면 남편이 근무하는 곳에 가 볼 수 있었을 텐데 하시며, 아직까지도 시댁식구들을 생각하면 화가 나신다고 한다.

현재까지 어르신 시신을 보지 못한 할머니는 어딘가에 살아있을 어르신을 기다리고 계신다. 시동생은 유골이 왔는데 왜 어르신의 시신은 수습이 되지 않았냐며 반문을 하신다. 아직도 어르신을 기다리는 할머니의 모습에 내 마음은 더욱 안타까웠다.

엎치고 덮친 격으로 그 무렵에 아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고 어르신을 잃은 슬픔에 아들까지 잃게 된 할머니는 큰 슬픔에 잠기셨다. 그리고 그 곳에서의 큰 아픔을 잊고자 거처를 시댁에서 친정으로 옮기셨다. 자식의 죽음에 외로워하던 할머니는 조카를 양자로 삼았지만, 양자도 사는게 바빠서인지 할머니를 거의 찾지 않고 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지금 할머니의 연세는 여든이 되었다. 기계의 발달과 문명의 발달로 인해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세상과 담을 쌓고 전화, 텔레비전도 마다하시며 혼자서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계신다. 그나마 움직임이 편할 때는 외출도 가끔씩 하셨는데 지금은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 않고 계신다.

그러한 할머니를 보고 있으면 어쩌다 할머니께서 고통의 짐을 짊어지고 저렇게 힘들어하고 계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우리는 할머니의 짐을 덜어드리지 못할까 하는 안타까움이 더해만 갔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나라의 전쟁으로 인한 비극적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이런 분들을 찾아서 적극 보호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어르신들의 마음을 보듬고 위로해드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보람과 뿌듯함을 느낀다. 하지만 어르신들을 보호하기에는 아직 우리나라의 환경이 미비하다고 생각한다.

정부와 국민 모두가 함께 나라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내야만 했던 이런 분들을 위해서 더욱더 관심을 갖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나도 더욱 진심 어린 마음과 행동으로 이분들을 존경하고 그분들의 마음을 녹여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되새기며 오늘도 어르신을 찾아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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