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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립선언 90주년을 되돌아보며 목포보훈지청 보훈과 박래선
2009-02-04
목포보훈청 박래선
 
경제가 어렵다. IMF 때보다도 더 힘들다는 얘기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기도 한다.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전체의 문제라 극복이 쉽지 않아 보인다.

온 국민의 관심과 눈은 어려운 경제현실 극복에 맞춰져 있다. 지혜를 모아 하루라도 빨리 극복을 해야 하는 것은 시대적 소명이겠지만 국민의 모든 관심이 쏠리면서 우리가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기도 하다.

오늘은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의 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로 시작하는 2.8 독립선언이 1919년에 선포된 날이다. 90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한국을 비롯한 약소민족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보도 등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직접적으로는 재미 한국인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했다는 보도를 접한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2.8 독립선언이다.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9년 1월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 김도연, 백관수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송계백을 국내로, 이광수를 상해로 파견한다.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 및 일본정부, 일본국회 등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으나 무자비한 일본제국주의의 첨병인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이 이루어지고 실행위원 10명 등 27명의 유학생이 체포되는 등 갖은 핍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일본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피어난 독립에 대한 열정이 한민족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독립운동의 찬란한 꽃을 피운다.

다른 곳도 아닌 일본제국주의의 본토에서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노라.’라고 외쳤던 피끓는 애국 청년들의 나라 사랑 정신, 그 정신을 되돌아보고 그 정신을 국민 통합의 매개로 삼아 어려운 경제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참된 지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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