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박영동의 산방야화 (3)
  • 기사등록 2013-06-17 12:02:34
  • 수정 2014-12-04 16:27:14
기사수정
 
이세상의 모든 사물은 멈추어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이 돌고 돌아가는 인생살이 중에 오가는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들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만, 스쳐가는 바람 따라 떠나갔다가 흐르는 구름 따라 되돌아오는 것이 방랑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것입니다.

형상이 자리한 인간계에서의 첫 울음으로 세상을 고하는 탄생은 허상이 맴돌다 떨어진 선계에서의 종점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사의 방황이 끝나가는 종점에서 다시금 선계의 아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봄도 부질없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계와 선계의 시작과 끝은 마치 하나의 끈으로 이어진 원형으로 수많은 시간들을 켜켜이 쌓아가면서 끝없는 윤회의 과정을 거쳐 진실로 아름다운 자리를 찾아 영원한 평화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느 날 한 사나이가 광야에서 헤매다 미쳐 날뛰는 코끼리나 굶주린 사자를 만나게 되었다면, 당연히 생명을 건지기 위하여 온힘을 다하여 도망을 치게 될 것입니다.

혼쭐이 빠지는 절체절명의 순간 들판 한 가운데에서 오래된 우물을 발견하게 되면 무작정 밑으로 향하는 등나무 줄기를 타고 내려가게 될 것이 뻔한데, 간신히 한숨 돌리고 무심코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바닥에서는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위에는 맹수가 있고 아래에는 독사가 기다리고 있는데 내려 갈수도 다시 올라갈 수도 없이 팔에는 힘이 점점 빠지고 있습니다.

사나이의 운명이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이 매달려 있는데도 이번에는 하얀 쥐 한 마리와 검은 쥐 한 마리가 하필이면 등나무 줄기를 교대로 갉아먹고 있습니다.

점진적인 시간의 흐름과 함께 언젠가 운명이 다하는 순간이 닥치고 있음에도, 우물가에 있던 큰 나무에 달려있는 벌집에서는 벌들이 날아다니는 날개 짓에 꿀이 넘치며 사방으로 튀면서 한 방울씩 사나이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창기에 상영되던 흑백영화의 필름이 그 짧은 찰나에 영원히 멈추어 주었다면 그야말로 행복한 장면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지는 데도 그나마 꿀이 있어 다행입니다.

우리 인간계의 마지막은 언제일지 모르지만 모두에게 어김없이 닥쳐올 것이 틀림이 없다 할지라도 그 잠간동안의 꿀맛을 끝내 버려야만 할까요.

어차피 크게 보면 삼라만상의 이법으로 보여 지고 끝없이 공전하는 우주가 향해가는 곳이기도 하여 다음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고행을 마다지 않는 순간일지라도, 온몸으로 느끼는 그 고통이 꿀맛과도 같이 전해지면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쓴 것은 쓰고 단 것은 달기에 최후의 시점에 내리는 단맛은 기꺼이 챙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세상의 뜻을 높이 세우신 분들의 지고지순한 말씀 중에도 보이지 않는 단 꿀이 깊숙하게 져며 있을지 모르기에 수시로 절차탁마의 마음으로 염화시중의 꿀맛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혹시 모르지만 다음 세상에 가는 밑천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다음에 오는 것도 중하지만 끝나가는 지금의 촌음마저도 기필코 소중하다는 깊은 뜻도 될 것입니다.

예전에 시골 마을에서 나름대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는 국 참봉이라는 사람이 만암 스님에게 찾아가 법문을 청하면서 “스님. 몸도 늙어가는 데다, 흉년으로 마을에 도둑이 들어 살아가는 마음이 영 뒤숭숭 합니다”라고 하니 “허허 그게 가진 사람의 마음입니다.

흉년이 들면 도둑 걱정, 물난리가 나면 물 걱정, 늙으면 재산을 어떻게 할까 걱정이니 어찌 마음이 편할리 있겠습니까. 참봉께서는 오시면서 무었을 보셨는지요”라고 묻자 “오면서 방물장수를 보았는데 고무줄을 팔고 있었습니다. 당기면 늘어나고 놓아두면 줄어드는 모습이 매우 신기하였습니다”고 답변하자 “고무줄이 좋은 것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줄어드는 데도 묘미가 있습니다.” 국 참봉이 말을 받으며 “그렇습니다. 계속하여 늘어나기만 하고 줄어들지 않는다면 고무줄이 쓸모가 없겠지요”라고 하자, 만암 스님이 넌지시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재물도 모으기만 하면 늘어나는 고무줄과 같고 아끼면 줄어들기만 하는 고무줄과 같습니다”고 답변하자, 그때서야 국 참봉이 무릎을 치면서 고무줄을 늘어지게 하듯이 재산을 늘리기만 하면 결국에는 끊어지고 만다는 이치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를 벗어나는 집착에서 벗어나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재산에도 크게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을 대하거나 평할 때 내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고무줄과 같이 쓴다면 엄청난 오해가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상대방의 잘못과 오류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관용의 고무줄은 국 참봉의 고무줄과 함께 세상을 밝히는 단 꿀이 될 것입니다.

단군왕검께서 전쟁 중에 붕어하신 선왕의 뒤를 이어 세상을 수습하기 위하여 급하게 이천리 길을 달려 새로운 나라를 세우면서 미처 데려가지 못한 단웅국의 백성들이 단군을 그리며 애타게 불렀다는 아리랑은 지금도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 각 지역마다 수많은 형태의 아리랑으로 발전되어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 집의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위 구절은 정선 아리랑의 한 구절입니다.

만공 스님께서 덕숭산 수덕사에 주지로 계시는 동안에 어린 행자승(원담 스님)은 우연히 나무꾼들을 따라 산에 나무를 하러 가서 위 정선아리랑의 가사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철이 없던 어린행자 승이 새롭게 터득한 노래를 절간에 돌아다니며 자랑삼아 부르고 다니는 동안 스님들이 책망하면서 못하게 하는 것을 목격한 스님께서는 “그 노래가 참으로 좋으니 너는 오늘부터 이 절간이 떠나갈 때까지 마음껏 부르고 다녀라”고 엄명을 한 것입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행자승은 기분이 내키는 대로 온 절간을 돌아다니며 수시로 불러대니 대중들이 당혹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서울에서 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하여 왕실 상궁과 나인들이 도착하여 법문을 구하자 드디어 스님께서는 행자 승을 불러 앞에 세우고 노래를 부르도록 하자, 그동안 수백 번도 더 불렀던 노래인지라 어깨를 들썩이며 구성지게 부르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여인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으로 일그러지면서 웃음을 참으며 얼굴이 붉어지거나,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할 말을 잃어 동자승을 쳐다보고 있는데 “오늘 법문은 이것으로 대신하겠소.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사람은 이 노래에 담긴 뜻을 깨우쳐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요.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추잡한 잡념이 떠올라 그저 노래만 듣고 갈 것입니다.”

스님이 행간에 숨겨둔 법문의 참 뜻은 “미물인 딱따구리도 애써 생나무를 뚫어 그 진실을 파헤치는데 어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빤히 보이는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는가”고 대갈일성으로 대신하신 것입니다.

경허 스님께서 천장 암에서 모시고 있던 어머님의 생신을 맞이한 날 어머니를 위하여 특별법회를 열었는데 구름 같이 모인 대중들을 향하여 거침없이 주장자를 힘껏 내리치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들은 숨을 죽이고 과연 스님께서 무슨 말을 하실지 가슴을 졸이면서 지켜보는 사이 서서히 가사장삼의 고름을 풀어헤치면서 하나씩 옷을 벗는데 마지막에는 속옷까지 모두 벗고 벌거숭이로 대중 앞에 선 것입니다.

이를 목격한 어머님은 “아이구 경허가 실성을 했구나. 세상에 이런 망측한 짓을 내 앞에서 하다니 날 좀 내방으로 데려다 줘”라고 하면서 얼굴을 가린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것입니다.

경허스님은 껄껄 웃으면서 벗었던 장수편삼을 차근차근 입으면서 “내가 어렸을 때는 몸을 발가벗겨 씻기고, 안고, 물고, 빨고, 쉬이 소리 질러 오줌까지 뉘어 주시더니 이제 와서는 왜 그렇게 못하고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시는지. 나는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의 아들인데 어머니는 나를 외간 남자로 보셨는가. 내 어릴 때 내 잠지를 귀여워도 하시더니 왜 이제 흉물이나 원수처럼 여기실까. 변함없이 아들인 하나의 몸을 왜 어머니는 두 개의 눈으로 본단 말인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게 어머니는 간 곳 없고 여자 하나 남았구나.“고 한탄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 일지라도 무상한 세월이 흘러 성장한 아들과 어머니의 사이에서도 사심 없는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바랐지만, 세월의 흐름이 두 사람의 사이를 벌려 놓은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 것입니다.

마치 강물이 수백 년을 변함없이 흐르되, 뒷물이 앞에 물을 밀어내면서 매일 같이 새로운 물이 흐르는 것과 흡사할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처음부터 몸은 하나였고 생각 또한 한줄기 이지만 날마다 새로운 기운이 밀려오고 나가는 사이, 흐르는 시간의 변화에도 의연하게 초심을 유지하기 바라는 것은 희망사항 일지도 모릅니다.

지상에 발을 딛고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인간이 흐르는 바람과 구름의 기운으로 보양을 하고 신선처럼 살고 싶은 갈망에도 불구하고, 생명체를 유지하려는 평범한 번뇌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자리할 뿐 아니라, 이를 높은 의지로 승화 시키려는 중생들의 갈등은 영원히 풀어가야 할 과제로 우리 앞에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jnnews.co.kr/news/view.php?idx=102815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확대이미지 영역
  •  기사 이미지 지리산 노고단에 핀 진달래
  •  기사 이미지 보성군, 연둣빛 계단식 차밭에서 곡우 맞아 햇차 수확 ‘한창’
  •  기사 이미지 강진 백련사, 동백꽃 후두둑~
한국언론사협회 메인 왼쪽 1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