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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가 없으면 범인이 아니다.
  • 기사등록 2009-09-07 08:5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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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살인 사건처럼 인명(人命)이 관련된 사건의 경우, 함부로 조사를 끝내거나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의문이나 의혹을 남김없이 풀어 원통함이 없도록 하려는 인정(仁政)의 원칙이 확고했다.

유교로 똘똘 뭉친 보수적인 사회에서는 범죄자를 마음껏 조작하여 임의적으로 처리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범죄 수사에 관한 한 형식적인 조사로 마무리 짓지 않았다는 뜻이다. 증거 확보나 과학적인 조사 등을 거쳐 법 집행까지 현대에 못지않게 인권을 중시하여 범인이 분명한데도 증거가 없으면 무혐의 처리했다.

다소 후대의 사건이기는 하지만 1901년 8월 15일, 전주 부서면에 사는 이경선이라는 사람의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17일에 전주 군수 이삼응은 소문을 듣고 현장으로 출동하여 먼저 그의 부인 장씨를 심문하였다.

장씨는 그가 항상 도박과 술로 세월을 지새웠고, 자신이 35세의 나이로 술을 팔아 생계를 꾸려왔는데, 8월 14일에도 술 팔아 번 돈을 이경선이 도박으로 모두 잃고 돌아와, 서로 다투었다고 했다. 다툼 끝에 남편인 이경선이 집을 나갔는데 닭이 우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돌아와 밥을 먹고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장씨 역시 잠이 들었는데 날이 밝아 깨어 보니 남편이 허리띠로 서까래에 목을 매어 죽어 있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이웃인 이광숙에게 부탁하여 끈을 풀어 내렸지만 이미 죽어 있었다고 했다.

검험관이 시신을 검험하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미 염을 하려고 관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 이경선의 시신은 머리를 북쪽으로, 다리를 남쪽으로 하고 누워 있었다. 신장은 5척 1촌이었고 풀어진 머리카락을 재어 보니 1척 5촌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반쯤 벌린 채 두 손은 주먹을 쥐고 있지 않았으며 다리는 곧게 펴고 있었다.

방이 좁아 실내에서 검험할 수 없어 밖으로 옮겨 더 자세히 살폈다. 오작사령(시체를 다루는 관비)인 유덕만을 시켜 차례로 옷을 벗겼다. 눈동자는 튀어 나와 있었고 청흑색으로 부풀어 오른 복부를 두드리니 소리가 났다. 배꼽 아래는 청홍색을 띈 채 몹시 부어 있었고 뒤집어 항문을 보니 역시 돌출해 있었다. 『증수무원록언해』의 중독사 즉 독살 조항과 너무 흡사하여 독살이 분명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관에 알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언뜻 봐서도 시체는 자연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흉측한 몰골이었기에 충분히 타살을 의심할 만했다. 특히 검험에 중요한 허리띠를 태웠다는 것을 볼 때 증거인멸을 위한 조처로 보였지만 이미 사라진 허리띠를 찾을 수는 없었다. 장씨는 그들 부부가 결혼한 지 17년째로 그동안 1남 2녀를 낳아 길렀는데, 목을 맨 허리띠는 경황이 없어 불에 태워 버리고 말았다고 진술하였다.

이경선의 시체를 내렸다는 이웃 이광숙을 심문하니 장씨 부인이 수년 전부터 박사권과 간통하는 사이로 부부싸움이 잦았다고 설명했다. 장씨 부인도 자신이 술장사를 하다

우연히 박사권을 알게 되어 간통하였는데 동리에 소문이 나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되어, 아예 7월에는 박사권과 함께 도망가 함께 살기도 했다고 간통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자식들 생각이 나고 비록 무던히 속을 썩이는 남편이지만 외간 남자와 계속 도망만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간통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장씨 부인은 8월14일에 남편이 만취해 박가 놈을 잡아 죽이겠다며 술을 연거푸 마셔 댔지만 자신이 잘못했다고 빌자 그녀에게도 술을 주어 함께 마시고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용서해주겠다고 술까지 준 남편이 박사권에 대한 원한을 풀지 못하고 이렇게 목을 매 죽고 말았으니 자초지종을 모르겠다며 남편의 자살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이웃 이광숙은 장씨 부인과의 대질심문에서 그녀가 남편을 독살했음이 틀림없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지난번에 나한테 그러지 않았소. 남편이 박사권과 간통한 일 때문에 자주 때리므로 술에다 양잿물을 타 먹였다고. 내 분명히 들었소.”

그러나 장씨 부인은 이광숙의 말은 모두 음해라며 큰소리를 질렀다.

“네 놈이 지금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런 근거도 없는 소리를 하느냐?”

그런데 복검(覆檢) 때 초검(初檢) 당시 변명을 일삼으면서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장씨 부인이 뜻밖에도 진술을 번복하고 간부(姦夫) 박사권의 사주로 남편을 독살했노라고 시인했다. 남편을 살해하면 평생 같이 살 수 있다던 박사권이 양잿물을 주면서 술에 타서 먹이라고 했는데 부부의 인정상 곧바로 죽이지 못하다가 드디어 15일 밤에 결행했다는 진술이었다.

범행 용의자가 자신이 독살했다고 자백했으므로 이제 사건을 종결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장씨 부인의 말을 과연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데다 사건의 핵심인 박사권이 도주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판결은 박사권이 잡힐 때까지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2년 뒤에 마침내 박사권이 체포될 때까지 장씨 부인과 사건 관련자들은 옥에 갇혀 있었다.

전주 군수는 박사권에 대한 심문에 들어갔다. 박사권은 고리대금업자로 장씨 부인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종종 만나 통간했음은 인정했다. 하지만 갑자기 장씨 부인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붙잡히면 곤욕을 당할지 몰라 도망갔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과 관련된 장씨 부인의 진술은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박사권의 진술만 믿는다면 이경선을 죽이려고 장씨 부인에게 독약을 주거나 사주한 일은 전혀 없으며, 장씨 부인이 무고한 사람을 물고 늘어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장씨 부인을 다시 추궁하자 그녀는 또 말을 바꾸었다. ‘박사권의 사주’는 이웃 이광숙이 시켜서 꾸며 댔다는 것이었다. 이광숙이 말하기를 박사권이 독약을 주면서 남편을 죽이라고 사주했다고 하면 도망 간 박사권이 모든 죄를 뒤집어 쓸 테니 그리하라고 했다는 설명이다.

전주 군수가 계속 거짓말을 하는 장씨 부인에게 호통을 치자 그녀는 또 다른 진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남편 이경선이 원래 도박 빚이 많아 이를 괴로워하다가 자살한 것이 틀림없다는 말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짓 증언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조사자인 진산 군수 서상경에게 사건이 넘어갔다.

서상경은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다. 초검 때는 남편이 자살하였다고 하고 복검 때는 박사권의 사주로 양잿물을 먹여 살해한 것이며, 다시 남편이 다른 사람에게 빚을 져 이를 비관하여 목을 매었다고 계속 번복하는 것을 볼 때 범인이라는 심증은 가지만 장씨 부인이 범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장씨 부인을 도와 이경선의 사체를 서까래에서 풀어 내렸던 이광숙이 송사 중에 옥중에서 죽고 말았다. 사건을 원점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이광숙이야말로 장씨 부인의 독살을 주장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증인이 사망하자 장씨 부인은 거칠 것 없이 자신은 무죄이고 억울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물증이나 증언이 확보되지 않으면 의법 처리할 수 없는 것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조사관들은 장씨 부인을 범인으로 확신했지만 수차례의 검시와 대질 심문, 그리고 관련자 체포와 재조사를 통해서도 그녀가 살해했다는 확실한 증거물과 자백이 나오지 않자 결국 그녀를 진범으로 확정할 수는 없었다.

진산 군수는 장씨 부인에게 살인혐의를 취소하고 박사권과 함께 엄벌하도록 요청하는 선에서 사건 조사를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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