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미래를 내다 본 ‘예언가' 조헌
  • 기사등록 2010-10-14 14:48:51
기사수정
 
김포출신 중봉 조헌 선생 인물에 대한 이미지는 그 동안 학자, 정치개혁가, 문인(시인), 의병장 등으로 인식되어 왔다.

조헌 선생은 예언가로서 또 다른 모습을 갖고 있었음을 지나칠 수 없다. 어쩌면 학자로서, 정치개혁가로서 그의 진면목은 도가사상에 뿌리를 두었던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본다.

‘예언가'로 활동한 새로운 조헌선생을 만나보자.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실록 선조25년(1592) 8월1일자 기사는 조헌이 ‘예언가임을 말해주고 있다. 기사 제목을 보면 ‘조헌이 천문과 인사의 길흉을 헤아렸다’고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제목으로만 보면 분명 조헌은 천문, 지리에 밝은 ‘예언가'로 나타난다.

“<중략>그러나 그 계책이 채택되지 않자 밤마다 천문(天文)을 우러러 살피면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온종일 먹지 않기도 하였는데,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그리고 늘 처자로 하여금 무거운 것을 지고 걷는 일을 연습하게 하였으며, 또 문인(門人)으로 하여금 글을 읽는 여가에 날마다 30리씩 걷는 연습을 시키면서 말하기를 ‘머지않아 왜적의 난리를 피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시급한 업무이다’ 하였는데, 문인들이 모두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일본이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는 예언의 내용으로써 30리씩 걷는 연습을 시켰다는 것은 피난준비를 했다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조선의 성리학자로 볼 수 없는 행동거지다.

하늘의 징조를 보고 천문을 예언

계속해서 같은 자료의 내용이다. “<중략>신묘년(1591/선조24년) 가을에 문인 박정로(朴廷老)와 함께 금산사(金山寺) 누각에 올랐는데, 붉은 기운 세 가닥이 하늘 북쪽에 길게 뻗치고 서남쪽으로 반쯤 뻗쳐 있는 것을 보고 박정로에게 말하기를 ‘수길(秀吉)의 군사가 이미 움직였으니 내년에 틀림없이 이 기운처럼 대대적으로 침입해 올 것이다. 모름지기 일찍 피난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 해 봄에 선조의 묘소에 성묘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하며 난리가 일어날 것이므로 하직한다는 뜻을 고하였다. 그 뒤 처(妻)의 장례를 치르려고 친척과 빈객이 와서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우레처럼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이에 ‘왜병이 바야흐로 바다를 건넜다’ 하고는 장례를 재촉하여 끝내고 공주(公州)로 돌아왔는데, 적이 과연 그날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다” 조헌이 하늘의 징조를 보고 즉 천문 예언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또한 조선 인조 때의 문신 김상현의 시문집인 청음집★ 제28권 ‘고(故) 의병장(義兵將) 증(贈) 이조판서 중봉(重峯) 조선생헌(趙先生憲)의 신도비명 병서’에도 조헌의 예언에 대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중략> 그러나 상소를 올린 지 3일이 지나도록 비답이 내려지지 아니하였다. 이에 선생은 주춧돌에 이마를 찧어 피가 얼굴에 흘러내렸다. 이를 본 어떤 사람이 선생께서 괜히 자신을 괴롭게만 하는 것이라고 조롱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말하기를 ‘내년에 산골짜기로 피난을 가게 되어서는 반드시 내가 한 말을 떠올릴 것이다’하였다.

<중략>”라고 예언하고, 또 자료는 “선생은 <주역>의 점술에 아주 능하였다. 임진년 4월에 동남쪽에서 우레가 울리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는 하늘의 북소리이다’하였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밤에는 천문을 살펴보다가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더니 한참 뒤에는 다시 하늘을 우러러 보고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화(禍)가 행조(行朝)에 미쳤는줄 알았는데, 다시금 자세히 살펴보니 북쪽으로 가신 두 왕자께서 필시 적중에 빠졌겠구나’하였다.

문인들이 이를 기록해 두었는데, 그 뒤에 보니 같이 밝아서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반드시 천리와 인심의 정도에 근거를 두고 시무(時務)와 사의(事宜)의 변칙(變則)을 참고하였는바, 이는 실로 추산하거나 억측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자료는 구체적으로 조헌이 <주역>의 점술에 능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헌의 예언 능력은 예사롭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헌은 이 같은 예언의 능력을 어디에서, 또는 누구를 통해 배웠을까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해답은 정철(鄭澈)의 아들 정홍명(鄭弘溟)이 인조21년(1643)에 지은 <기옹만필(畸翁漫筆)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중략> 조중봉(趙重峰 조헌)은 토정에게 배웠는데, 경서와 역사에 깊이 잠심하여 노력을 남보다 더하였다. 그의 저술한 글을 보면, 앞일을 아는 슬기가 자연히 부합되니, 이것이 이른바 ‘지성(至誠)은 미리 안다’는 것인가. <중략>중봉은 천문학에 밝았는데, 신묘년(1591, 선조 24) 세모에는 매양 왜구를 근심하여 전후 상소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임진년 초봄에 아내가 죽어 장사지내는데, 미처 구덩이를 덮기 전에 문득 매우 놀라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천고(天鼓)가 동하였으니, 반드시 평수길(平秀吉)이 군사를 일으켰다’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과 장례에 참석한 친척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각기 돌아가서 빨리 피난할 준비를 하라. 나는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이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 믿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서 적의 경보가 이르렀다” 고 말하고 있다.

이 내용으로 보면 조헌의 예언능력은 토정 이지함 선생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천문학에 전문가이고, 일본의 토요테미 히데요시가 군사를 끌고 조선을 침공할 것이므로 피난준비와 조헌 본인의 운명을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조헌은 자신이 예언한 대로 의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jnnews.co.kr/news/view.php?idx=43600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확대이미지 영역
  •  기사 이미지 (주)국민, 장학금 기탁
  •  기사 이미지 서구, 골목정원 가꾸기로 ‘함께서구’
  •  기사 이미지 보성군 차(茶)향 물씬 풍기는 초록빛 수채화 풍경
보성신문 메인 왼쪽 3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