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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의 “비익조연리지” (比翼鳥連理枝)
  • 기사등록 2010-11-15 15:09:39
  • 수정 2014-12-04 17: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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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을 무심코 살아가면서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새기지 않아 혼용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똑같은 칼이지만 “검”은 양날이 있는 것을 말하고 “도”는 등이 있고 한쪽의 날만 있는 칼을 의미한다.

봉황을 그려 놓은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봉황”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왼쪽의 귀한 새가 “봉”이요 오른쪽의 새가 “황”이라 한다.

조선시대 첩의 자손들을 “서얼”이라 하였는데 이 또한 양인의 첩 자손을 “서”라 하였고 천인의 첩 자손을 “얼”이라 하였다.

“비익조연리지”를 줄여서 “비익연리”라 하였다는데 “비익조”는 날개와 눈이 하나인 전설상의 새로써 암컷과 수컷이 결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늘을 날수 있으며, “연리지”는 뿌리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고 생활하여 각 개체의 특성은 유지하지만 한쪽이 약하면 다른 쪽이 영양분을 공급하여 서로 부양하여 살아가는 현실의 나무를 일컫는 말이다.

요사이 시절이 너무도 좋은지는 몰라도 결혼 청첩장의 홍수 속에 살아가면서 친분 있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서로 100년의 가약을 맺어 “비익조연리지”처럼 완전히 한 몸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우리는 때로 완벽한 사랑을 꿈꾸어 보기도 하였지만 현실에 괴리가 있었고 가변적인 현실에 부딪혀 미처 이루지 못한 아픔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씁쓸한 감회에 젖어보기도 하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2대 황제 유리왕은 화희부인과 치희부인간의 다툼사이에 치희가 자신을 버리고 가버리자 애틋함을 달래지 못하여 “저기 노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워라 이내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까”라는 “황조가”를 지어 제왕인 자신도 마음대로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환을 노래로 풀고 있다.

고려 충렬왕은 연경에서 생활하는 동안 연나라 여인과 사랑에 빠진 후 헤어지는데 손에 연꽃 하나를 쥐어 주며 ‘상께서 돌아가시는데 이 꽃을 보시고 혹시 시들면 이 목숨 다하는 것으로 아십시오’ 하고 며칠이 지나자 꽃이 초췌한지라 왕이 마음 약해 돌아가려 하므로 충신 “존비”는 만류하고 자신이 가보겠다 하여 연나라 여인을 만나니 “서로 바친 연꽃의 향기여/ 처음에는 붉은 빛 싱싱하였지/ 가지를 갈라 며칠이 지나니 /초췌하기가 님과 같아라”는 시를 전하였으나 충신은 “어리석은 사람아, 어리석은 사람아,/ 수레를 멈출 것 없다오/ 이 몸이야 연잎에 이슬 같아/ 거기서 구르면 여기서 둥글다오.” 라고 권사(權辭) 하여 바치니 왕이 실망하여 마침내 귀국하였다.

뒷날 연나라 여인을 계속하여 원망하므로 “존비”는 가슴이 아파 “신이 봉환을 서두르기 위하여 임금을 속였으니 죄를 달라” 고백하자 연인에 대한 정이 깊은 왕은 노하여 관직을 뺏고 유배를 보냈다.

이에 태자와 조신이 왕께 충신의 뜻을 간언하여 관직을 회복시켜 소환하였으나 사자가 당도하기 전에 유명을 달리하였으니 자태가 미색인 여인으로 인한 비극이었다.

무릇 고대사의 현장에는 미색이 뛰어난 여인들로 인한 현기증 나는 희로애락의 이야기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와신상담’ ‘오월동주’의 주인공들인 오의 ‘부차’와 월의 ‘구천’은 역사상 가장 처절하게 대립하였던 인물들이다.

오나라에 의하여 나라를 잃었던 월 구천과 그 신하 범려는 의지를 굳히기 위하여 짐승의 쓸개를 빨면서 권토중래를 노리는 동안 그 비책으로 나무꾼의 딸로 태어났지만 미모가 너무나도 빼어난 “서시”라는 여인을 호색한인 부차에게 바쳐 정치를 태만히 하도록 하여 틈을 타서 힘을 길러 오나라를 멸망 시켰으니 여인의 미색으로 일국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서시”가 심장질환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너무도 매력적이어서 당시 여인들이 덩달아 서시를 따라 얼굴을 찌푸렸다 하고, 개울가에서 손수건을 씻는 서시를 보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고 물속에 가라 앉아 “침어”라 하였다니 가히 자색의 뛰어남이 어떠하였는지 미루어 짐작이 갈 뿐이다.

서한 원제의 후궁으로 5년간의 허송세월을 보내다 흉노의 호한야 선우(왕)의 아내가 되어 아들 하나를 낳았다가 호한야의 죽음으로 다시 남편의 본처 아들인 복주루 선우(왕)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으면서 풍운의 일생을 살아간 “왕 소군”의 인물 또한 얼마나 출중하였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궁녀가 3,000에 이르러 황제가 일일이 대면을 할 수가 없으므로 ‘모 연수’라는 화가에게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였는데, 돈이 없는 왕 소군은 화가에게 뇌물을 바치지 못하여 초상화가 실물보다 추하게 그려졌고, 그런 연유로 흉노의 왕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뒤늦게 말을 타고 궁궐을 나서는 왕 소군의 빼어난 미모를 알게 된 황제는 너무나 애석하여 화가를 참형했다고 한다.

변방에 봄이 왔음에도 꽃과 산록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여 남쪽을 바라보며 “춘래 불사춘”(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도다)이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고향에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악기를 연주하자 그 소리에 얼이 빠진 기러기가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지므로 “낙안”이라 칭하였다 한다.

삼국지에 유명한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였던 미녀 “초선”이 화원에서 달을 보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림에 양부인 “왕윤”이 “달도 내 딸에게는 비할 수가 없다” 하며 “폐월”이라 하였다 한다.

중국 역사상 미색에 있어서 “양귀비”를 빠뜨릴 수는 없다.

고아로 태어나서 양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가 나중에 당 현종의 18왕자 수왕의 비가 되었다가 현종의 무혜비가 죽자 황제가 아들에게 새로운 여자를 맺어주고 데려다 6년 후 귀비로 책봉하였다.

미인이 화원에 가서 함수화를 건드리자 부끄러움에 잎을 말아 올렸다고 하여 “수화” 또는 “절대가인”이라 하였다 한다.

이제까지 지켜본 바로는 미색을 갖춘 여인들은 한결같이 그 팔자가 기구하고 삶 자체가 바람 앞에 등불처럼 가슴 졸이는 한편의 드라마 였다. 인생의 질곡과 역정 또한 그 변화가 무쌍하였다.

하지만 역사는 미색이 뛰어난 여인들을 하나의 귀중품처럼 다루며 흥미를 북돋기는 했으나 그 성품과 됨됨이에 대해서는 한조각의 서술도 하지 않은 인색함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색 “황진이”는 남북한의 체제를 극복하고 신구의 벽을 넘나들어 뿌린 화려한 일화로 대중의 사랑과 인기를 폭넓게 받고 있다.

당시의 서얼로 태어나 인물이 빼어난 여인들은 양가집 첩으로 가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음에도 황 진이는 평범하고 안락한 삶 대신에 운명에 도전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택한 것이다.

춤과 음악과 시를 연마하여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할 제 쉬어감이 어떠하리”라는 격조 있는 불후의 구애 시로 조선최고의 군자라 불린 “벽계수”의 마음을 빼앗고, 불가의 생불로 통하던 “지족선사”를 파계시킨 것도 모자라, 중종 4년에 등과하여 시문에 능하였고 대제학의 벼슬에 오른 “소 세양”이 “황진이가 절색이라고는 하나 나는 그녀와 30일만 함께 하고 깨끗이 헤어질 것이다.

만약 하루라도 더 머물게 된다면 너희들이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고 발설하고 30일간의 열애에 들어가 마지막 날 이별의 술잔을 기울였으나 황 진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시 한편을 써주는 것으로 하여 “소 세양”의 마음을 움직여 끝내는 굴복시키고 만다.

도학군자로 이름을 날리던 화담 “서 경덕”을 유혹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여 사제의 연을 맺고, 동양제일의 소리꾼이자 선전관이었던 이사종과 6년간의 사랑을 나누며 조선팔도를 유람하였다.

자신의 미색과 재주를 숨기지 않고 전국을 다니며 백성들에게 그대로 선을 보였으니 가는 곳마다 즐거워하고 놀라고 환영하는 발길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생활이 고단한 사람들에게 뿌려준 기쁨과 환희는 금전으로 환산이 되지 않을 뿐 더러 그로부터 수많은 세월이 흘러간 뒤에도 후학들의 아쉬움과 사랑을 독차지 하게 된 것이다. 

여러 남자들과의 염문을 뿌린 것이 어떻게 보면 부도덕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조선의 신분사회가 인정하는 기생이었고, 미색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지적인 재능을 겸비하였기에 신분을 넘어선 인간적인 사랑을 나누고 싶은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비익조연리지”와 같은 사랑을 나누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고대로부터 현세에 이르기까지 선남선녀들의 사랑이야기는 끊임없이 전해져 내려오지만 실패한 사랑의 흔적이 오히려 크게 느껴지고, 진실로 이루어진 사랑이야기가 드물어 보이는 것은 우리들 모두가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갈증은 원대하였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굴레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거친 세파에 시달려 몸은 땅에 있지만 마음은 푸르른 창공에 머물러 비록 퇴화된 날개일망정 애써 노력하여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현세의 “비익조연리지”가 되려고 지금도 미련 실은 무지개를 향해 부단한 날개 짓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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