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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유수(行雲流水) 박영동
  • 기사등록 2010-12-27 10:2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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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 요즈음 날씨가 평년보다 싸늘해지면서 눈발조차 심심찮게 날리니 그야말로 참다운 겨울이 온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어젯밤부터 지천으로 흩날리던 눈발은 아침에 온 세상을 덮어 장관을 연출하였는데 멀리 보이는 산에나 가까이 보이는 지붕들에 소복하게 쌓여 한편으로는 안락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고도 눈발은 쉬지 않고 하늘에서 무언가 소식을 안고 이리 저리 날리는데 이 향연이 언제 끝날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문득 산과 들에 흩어져 살고 있던 모든 짐승들이 이러한 때에는 어떻게 하여 생을 꾸려 나가는지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옛 어른들은 우리 살아가는 인생이 나그네 길이라고 하였는데 그것도 모자라 떠도는 구름과 흐르는 물처럼 현실을 방랑의 세월로 살아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현세에서의 허무함과 자신의 삶이 가진 한계에 부딪혀 끊임없는 유랑을 거듭하며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오르면 거침없이 시어를 뱉어내곤 하였습니다.

“조물주가 이 세상에 여인숙을 만들고/ 세월의 지나감도 모두 그와 같도다/ 천지가 생겨난 뒤 아침저녁이 거듭되고/ 혼연 오가는 것이 그 안에서 일순 쉬고/ 억천만년의 우주를 돌이켜 보아도/ 도 깨친 선인들이 자고 간 자리/ 가없는 천지에 저마다 한정이 있고/ 그사이 나는 백년의 나그네로다/ 세월은 잠깐 왔다가는 바둑판이고/ 혼돈으로 살았다 죽게 되는 것이 우주의 질서/ 사람은 오직하나이나 물질은 만 가지/ 행인의 일전과 화옹의 빛을/ 청풍과 명월이 주고 받더라/ 부상에서 닭 울음소리 울리자/ 끝없는 나그네길 너와 내가 따로 없도다.”라고 읊조리며 또다시 봇짐을 꾸립니다.

나그네는 오래 있게 되면 오히려 정이 들고, 정이 들면 또한 떨치기 힘드니 평안함이 오히려 과분하다며 계속 길을 재촉합니다.

한해를 마무리 하는 세월의 여울목에서 우리는 그동안 열심히 달려오긴 하였지만 무언가 인생의 남아 있는 것이 있는지 의문이 갑니다.

애초부터 남기려고 달려온 길은 아니었지만 그 많은 날들을 어디에 버렸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고 문득 인생의 허무함으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방랑의 길을 떠나보고 싶은 순간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음력 3월 땅거미가 밀려오는 강원도의 동해 낙산사에 올라 여인의 인기척에 놀라 “해마다 이 해는 한없이 가지만/ 날마다 오는 오늘 끊이지 않고/ 해가 가고 날이 오고 또 가니/ 하늘과 사람의 운명이 이중에서 일어나니.”라는 즉석시를 낭송하고, 그 천재성을 발휘하여 곧바로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 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고/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고/ 손님 접대도 집안 살림 형편대로 하고/ 시장에서 장사하는 것도 시세대로 하고/ 모든 일 마음대로 하는 것 못하지만/ 그런 그런 세상 그렇게 지나가세.”라고 하여 사실은 세상을 버리려 하였던 얼굴도 모르는 여인과 하룻밤의 연을 맺었다가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바닷가를 돌아 길을 떠납니다.

나그네는 계속하여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빠져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반년을 보낸 뒤, 추운 겨울이 눈앞에 닥쳐왔음에도 홑옷을 걸치고 구름처럼 흘러 함경도 문천 땅에 이르러 갑작스런 눈보라를 만나게 됩니다.

여러 곳에서 하루 숙박을 거절당하고 헤매다 앞에 보이는 대문을 무조건 두드려 사람 살리라는 비명과 함께 의식을 잃고 말았는데, 모진 목숨 천명이 다하지 않았는지 희미하게 의식을 회복하게 됩니다.

아무리 보아도 여인의 은밀한 곳으로 보이고 따뜻한 체온이 온 몸에 느껴지는데 상대는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나그네는 놀라서 누군가를 소리쳐 부르자 그때서야 여인은 어머니를 부르고 늙은 노파가 나그네의 얼굴을 살피더니 안심하고 자신의 딸에게 윗방으로 물러가게 한 다음 벌거숭이의 나그네에게 옷가지를 줍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노파는 꽁꽁 얼어버린 사람을 살리는 비법으로 자신의 딸의 체온을 이용하여 나그네의 생명을 구해준 것입니다.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후 닭을 잡고 손님을 초청하여 술잔치를 벌려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술 취한 걸음으로 밖에 나가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곧바로 목청 돋우어 “날려 오니 조각조각 3월의 나비 모양/ 밟아보니 소리소리 6월의 개구리 소리/ 추워서 못 가겠노라 눈은 말이 많은데/ 취하여 혹 머무를까 잔을 올리는 구나” 거미가 줄을 내듯 어느 사이 한수 읊습니다.

흥에 겨워 세상을 잊어버린 나그네는 노파가 깔아준 이불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과년한 처녀가 반라로 접근을 하니 거절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문득 푸념처럼 “풀이 우거지고 안이 넓으니/ 필시 다녀간 사람이 있구나” “시냇가 버들은 비가 없어도 자라고/ 뒷뜰의 밤은 벌이 없어도 터지니”라 응답하니 동짓달 길고도 긴 밤은 꿈같이 흘러 오히려 짧기만 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나그네는 “어젯밤 미친 나비가 꽃 속에서 자다/ 오늘 아침 홀연히 날아가니 누구를 원망 하리오”하면서 봇짐을 꾸립니다.

노파는 모처럼 얻은 사위가 길을 떠날까 보아 길길이 뛰면서 목숨까지 구해 주었는데도 그대로 가면 안 된다고 못 가게 하므로 할 수 없이 생각지도 못한 신혼의 단꿈에 빠지게 됩니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나간 뒤 방랑자는 함경도의 어느 산골을 유랑하였는데 흉년이 들어 더욱 지내기가 힘들고 제사를 지내는 집에 들러 저녁은 그런대로 잘 먹었지만, 아침에 보리죽을 내 왔는데 너무나 묽어 단숨에 들이 키고 “네 다리 소나무상에 죽이 한 그릇인데/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떠도는 구나/ 주인이시여 부끄럽다 하지 마시오/ 나는 본디 물에 푸른 산 드리움을 사랑 한다오”라는 명시를 남기게 됩니다.

방랑시인은 이따금 파격적인 발상으로 상상을 초월한 시구들을 토하여 자주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강물에 드리운 푸른 산 그림자 속 사슴이 알을 품고/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게가 꼬리를 치더라” “석양 아래 돌아가는 중의 상투는 3자요/ 베틀에 앉은 직녀의 불알은 1말 이더라” “동글동글한 중의 머리는 땀난 말 불알 같고/뾰족뾰족한 선비의 대가리는 앉은 개0같구나” “동림 산 아래 봄풀이 푸르렀을 때는/ 큰 소 작은 소가 긴 꼬리 흔들었을 테지/ 5월 단오절에는 수심 속에 보내고/ 8월 추석에도 두려울 테지” “생도는 제미십이요 선생은 내불알이라(학동은 다해야 열도 못되는데/ 선생이 와도 아룁지 조차 않더라)” “개구리는 풀 속에서 뱀을 만나면 날지 못함을 한탄하고/ 못 가운데 비를 만나면 도롱이 없음을 한탄하지요” 이처럼 시인의 생각은 어디로 가려는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리 저리 떠돌던 방랑의 시인은 평안북도 철산까지 가게 되었는데 밤이 깊어가자 서당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골 훈장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데 성격이 깐깐하여 자신이 운자를 불러 답변을 못하면 저녁밥은 없다고 하자 시인은 자신이 운자에 답변을 하게 되면 술 한 동이를 달라고 큰소리를 칩니다.

시골 훈장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큰소리로 “멱”자를 외치는데 “무슨 멱자입니까”고 묻자 “찾을 멱”이라고 하는데 사실 위 멱(覓)자는 거의 잘 쓰지 않는 글자임에도 운을 뗀 것은 골탕을 먹이려고 작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수많은 운자 중에 하필이면 멱자를 부르는가”고 답변하고 또 “멱” 하니 “저 멱자도 어려운데 하물며 이 멱자요” 또다시 “멱”하자 “하룻밤 자는 것이 이 멱자에 달렸으니” 또 “멱”하므로 “ 산골의 훈장이 다만 멱자만 아는 구나”라고 받아내니 “허허 나도 글줄깨나 한다고 자부하는데 노형과 같이 4멱 난운을 거뜬히 부르는 사람은 아마도 조선 팔도가 넓다 해도 당신 외에는 없을 것이요”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인 묵객들과 평양기생과의 일화는 우리 역사 속에 수시로 등장하는데 당시 평양 기생은 인물과 품위가 뛰어나 다른 지역의 기생들에 비하여 단연 으뜸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양녕대군은 시. 화에 능하여 후세에 그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는데 역시 여자를 밝히기도 하였던지 생전에 평양을 수없이 찾았다 합니다.

우리에게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헌 세자도 평양기생을 좋아하여 영조대왕 몰래 궁궐의 담을 넘어 500리길을 달려 누군지는 모르는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합니다.

우리의 방랑 시인도 마치 운명처럼 부벽루에서 읊었던 시에 반한 소야월이라는 기생과 며칠간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두 사람은 구룡산에도 오르고 배를 타고 대동강의 능라도, 두로도를 거쳐 양명포를 오르내려 강변의 경치를 마음껏 즐기면서 “대동 강물에 신선의 배를 띄우니/ 피리와 노래 소리 먼 바람에 실려 온다/ 나그네는 말 멈추어 듣기에 즐겁지 않으나/ 창오산은 저녁 어둠속에 그 빛이 흐리다”고 또 한줄 시 귀를 토로 합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단 몇 개월일지라도 머물다 가도 될 것이지만 울면서 만류하는 소야월을 뿌리치고 험한 세상에 몸을 맡기고 방랑의 길을 떠납니다. 그로부터 꼭 2년 반 동안 각고의 세월이 지나간 뒤 방랑자는 또다시 평양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자나 깨나 잊지 못하였던 소야월을 찾아 대문에서 여인을 불러보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만 되돌아 옵니다.

마침 밖에 나갔다 돌아온 소야월의 성장한 동생이 놀라면서 “언니는 서방님을 기다리다 병이 들어 돌아 가셨어요. 오늘이 바로 그 첫 제삿날이에요”라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합니다

이미 거친 세상살이로 망가 질대로 망가진 시인의 가슴에 또 다른 슬픔이 엄습해 옵니다. 토끼 산 공동묘지에 한줌 흙으로 돌아간 연인을 위하여 엎드려 소리 내어 울면서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는 자신의 설움에 뜨거운 눈물은 쉴 새 없이 쏟아집니다.

부모형제 처자식을 버리고 방랑의 길에 오른 것도 사실은 홍경래의 난 중에 비굴하게 항복을 하였던 선천부사 김 익순이 자신의 조부인지도 모르고 영월 사또가 주관한 백일장에 참여하여 “평안도 가산 군수였던 정시의 절개를 기리고 선천부사 김 익순의 하늘까지 사무칠 죄를 통탄하다”라는 제하에 “김 익순은 한번 죽음은 오히려 가볍고 만 번 죽음이 마땅하다”라는 내용으로 글을 지어 장원에 올라 상을 탔으니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시인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도록 아팠는지는 가히 거론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다가도 울고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울고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이 세상 모든 사물이 눈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후 시인은 전국을 동서와 남북으로 가르는 고행을 끝없이 반복하다 영남에 이르러서는, 전북 장수에서 사대부집 규수로 태어났으나 가세가 기울어 장수현감이었던 최 경희의 첩이 되었다가, 진주현감으로 발령이 난 최 경희를 따라 가면서 사대부의 여식은 첩이 될 수 없다는 나라 법에 어긋나므로 할 수 없이 기적에 올렸던 “논개”의 사연이 깃든 진주 남강에 올라 “촉석루”라는 시를 짓고, 원당리에서 푸대접 받은 사연을 또한 시로서 남겼습니다.

동래에 도착하여 부사에게 “바람이 예전에 다니던 길을 잃었고/ 달이 새로이 비출 곳을 얻었구나”고 하자 동래부사는 “바람이 일자 나뭇가지 움직이고/ 달이 떠오르자 물결이 인다”고 화답하였습니다.

김제의 벽골제, 고부의 눌제, 익산의 황등제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인공호수로 흔히 “삼호”라 하였다는데 충정도를 호수의 서쪽이라 하여 “호서”라 칭하였고, 전라도를 호수의 남쪽이라 하여 “호남”이라 하였다 합니다.

시인은 길고 긴 방랑의 길을 호남으로 향하였는데 나주 영암 고금도장흥, 보성, 순천, 좌수영을 거쳐 광양에 들어서면서 기침을 자주하며 미열이 나고 식욕도 없어지고 팔다리에는 기운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나그네는 호기를 부려 더 한층 술을 마시며 아픔을 잊으려 했건만 하늘은 긴 방랑에 마침표를 찍고 고달픈 영혼을 하늘로 맞이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나 봅니다.

산에는 단풍이 들어가고 겨울은 가까워져 시인이 발걸음을 재촉하므로 순창, 담양, 광주에 이르러 몸이 불편 했음에도 무등산이 보고 싶어, 100척을 넘을 듯 하지만 여섯 개의 귀퉁이를 내밀고 석벽의 길이와 높이가 수십 길로 돌무늬가 물결 같고 구름 같다는 서석대에 오릅니다. 산에서 내려온 방랑 시인은 갑자기 몸에 오한이 들어도 그냥몸살 감기려니 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고 화순 동복으로 향하던 중 체력의 한계로 마침내 쓰러지고 맙니다.

인심 좋은 민가에서 겨울과 이듬해 이른 봄까지 병상에 누워 공민왕이 난을 피하였다는 모후산을 끝내 보지 못하고, 마침내 길고 긴 이생의 여행길에 고요히 종지부를 찍었던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사망의 원인이 급성 폐렴이 아니었나 추측이 되는데 1863년 음력 3월 29일 향년 56세 였습니다.

장성한 아들이 나그네의 행적을 수소문하여 부자 상봉한 후 울면서 매달려 아버님을 고향으로 모시려 하자 감동한 나그네는 아들을 따라 나섰는데 잠시 뒤 좀 보고 오겠다하고 보리밭에 들어간 후, 한 많은 세상에 할 말도 많으나 가슴으로만 간직하였던 아들에게 삿갓만 남겨두고 또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합니다.

돌아가기도 어렵고, 머물러 있자니 또 어렵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방랑자는 끝내 길가에서 쓰러지는 운명을 스스로 택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사람의 가슴속은 우주와 같다 던데 방랑자의 가슴속에 일어난 세상에 대한 회환과 갈등과 비분과 강개, 죽음을 넘나드는 세월과 술로 채색된 순간의 환희, 그 모든 변화와 아픔은 어떻게 일어나고 지워졌는지 알 길조차 없지만 내 가슴속 밑바닥에서부터 울려오는 진동으로 미루어 그저 아득하게 짐작만 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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