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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의 별로 좌표를 삼아
  • 기사등록 2011-01-03 11:44:22
  • 수정 2014-11-19 21: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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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박영동] 우리 살아가는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보다 보람이 있고 풍요롭게 꾸려나가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 보이지 않는 아픔과 난관을 이겨내려는 끊임없는 담금질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떻게 하여 마무리가 되어 가는지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을 것입니다.

한겨울 폭설이 내려 온 세상을 가득 덮어 길마저 마음대로 소통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하지만 생각의 틀을 뒤집어 보면 오히려 혼자만의 생각에 몰입할 수도 있거니와 앞으로만 질주하던 본능을 접어두고 새삼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 더듬어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고 하였는데 경주와는 또 다른 인생역정에 있어 앞만 보고 달리면 눈부신 발전은 있겠지만 뒷이 허전하고, 뒤만 보고 달리면 인정의 끈으로 자신도 모르게 묶여 전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오다가 잠간 마음을 가다듬어 눈밭에 찍힌 발자국을 돌아보면 과거에 있었던 나의 행적이었음에도 수많은 세월이 쓸고 간 자취가 그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 새삼스런 스스로의 자화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서산대사는 시 한편을 남기셨는데 “ 눈덮힌 들판을 밟아 갈 때/ 모름지기 어지럽게 가지 말라 / 오늘 나의 발자취는 /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온통 내 마음대로 갈수 있는 길일지라도 어지러이 걷게 되면 뒷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뜻일 것입니다.

1980년도를 전후한 나의 젊은 날은 혹자들이 흔히 말하는 다사다난함을 넘어선 격변의 세월이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1977. 9. 29경 입대하여 논산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마치고 보충대대를 거쳐 철원평야 부근 철로 종단 점 신탄리의 독립중대에 배치를 받아 추운 겨울을 보내고 경기도 양평에 있는 용문리로 이사를 간 이후 매일 아침 06:00에 기상하여 22:00경까지 하루가 어떻게 하여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뛰고 또 뛰고 최정예 전투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수련하고, 때로는 목표도 모르고 끝없는 행군을 계속하여 이름 모를 산골짝에 텐트를 치고 숙박하였다가 새벽에 짐을 꾸려 어둠을 가르고 이동을 하는 고단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북쪽의 무장공비가 남한 땅을 활보하고 다니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팔당호 부근에 잠복하여 혹독한 겨울을 보내기도 하고, 속칭 “팀 스피릿” 훈련이라 하여 강원도 산골짝을 보름여 동안 헤매기도 하였습니다.

눈밭을 쉬지 않고 걷다 보면 군화 속에 눈 녹은 물이 차서 양말을 적셔 철벅거리다가 발길을 멈추어 텐트를 치고 2-3시간의 잠을 청하다 꿈속에서 울리는 호루라기 소리에 벌떡 일어나 어둠속에서 감각으로 군장을 챙기는 어려움은 물론이고,

군화가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얼어버려 발이 들어가지 않는데 절름거리며 집결지에 도착하여 사투를 벌여 겨우 군화를 신고 어디로, 얼마나 가는지도 모르는 채 기계적인 발걸음만 반복하였던 일이 허다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사회는 장기간의 독재정권과 민주화를 주장하는 대학생과 시민들의 투쟁으로 전쟁터를 방불 하는 갈등이 뿌리 깊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군인으로서는 모든 통상적인 생활을 접고 날마다 계속되는 데모 진압훈련에 진땀을 빼던 시절이었습니다.

1979. 10. 26. 그동안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 3군의 기동부대로서 느닷없는 계엄군이 되어 영문도 모르는 채, 꼬리에 꼬리를 무는 트럭의 행렬이 앞으로도 뒤로도 끝을 알 수 없는데 서울하늘을 향하는 트럭위에서 그날 밤을 꼬박 새우며 새벽 04:00경 어둠속에 서울시내의 태릉에 들어가 비상식량으로 허기를 채우고 임시 거처를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추위가 닥쳐올 때까지 그곳에서 지내다 한파에 못 이겨 시외의 예비군 훈련장으로 이동하여 석유난로가 뿜어대던 그을음으로 코가 시커멓게 변하는 등 약 28개월여 동안 우여곡절로 얼룩진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후로 사회에 나가면 아무런 대책도 없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날마다 반복되는 훈련에도 아랑곳없이 다른 사람의 보초근무를 모두 맡아 새벽 03:00경까지 서면서 나름대로의 서투른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고된 훈련과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였던 터라 앞으로 사회에 나가면 하루에 3시간만 자고 나의 인생을 위해 아낌없이 뛰어다닐 자신이 있으며, 적어도 나의 앞길에 안 되는 일이란 없다는 확신에 찰 정도로 자신감이 충만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주간에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다 밤이 늦도록 잠을 자지 않고 정신을 모으다 보니 에너지의 소모량이 얼마나 되는지, 배식 받은 김치와 음식물을 그릇만 빼고 모두 먹어치워도 밤이 깊어가면서 몰려오는 허기는 정말로 괴로움을 넘어서는 고통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참기 힘든 허기도 내가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 극복하여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월 봉급이 3,900원이었는데, 그 시절 라면 1개 값이 얼마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필요한 물건을 사고 나머지 일부금으로 라면 몇 개를 사두었다가 이따금 허기를 면하였어도 금방 바닥이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모님께 편지를 보내 아버님 사진 5장하면 만원권 5매, 어머님 사진 5장하면 오천원권 5매 등을 보내 달라 하여 책속에 봉함이 된 현찰을 받아쓰기도 하였지만, 나에게는 딴 나라 이야기였고 성인이 된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정신력이 앞선다 할지라도 견디기 힘들었던지 나의 자만심으로 인하여 급기야는 병을 얻게 되었는데 야전병원과 통합병원을 전전하며 여덟 번에 걸친 크고 작은 수술을 거쳐 마지막 아홉 번째 마무리 수술을 하고 완치가 되지 않았지만 이미 제대일자를 35일이나 넘겨 병상에서 4개월간의 투병을 마치고 서둘러 군 생활을 마감하였던 것입니다.

이후로 찬바람이 심해지는 겨울만 되면 적게는 4일 많으면 일주일이나 10여일 정도 한해에 몇 차례씩 고통의 늪을 헤매기도 하였는데, 오로지 인내와 정신력으로 버티고 아버님이 수시로 투여하여 주시던 항생제에 의지하여 이겨내곤 하였던 것입니다.

고통이 다가오는 쓸쓸한 겨울밤은 길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였는데 그동안 무슨 생각들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시절만 해도 마음에 여유가 있었는지 누군가 원망을 하면서 증오심을 불태우는 극단적인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80. 7. 24.경 제대하여 고향에 와보니 부모님을 비롯한 생활환경이 너무도 참담하여 몸도 온전치 않은 데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나주군 봉황면에 경지정리를 하면서 인부들이 임시로 거처를 하였던 스레트 지붕의 건물에 방 한 칸을 빌려 혼자만의 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아무런 기초지식도 없으면서 나름대로의 법률서적을 몇 권 사들고 밤낮으로 읽고 또 읽었는데 모르는 것이 있으면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고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주어진 책 이 곳 저 곳을 뒤져 가면서 스스로 그 뜻을 짐작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참 뜻을 알게 되면 혼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곤 하였던 것입니다.

두껍기도 하였지만 방대한 내용들 중에서 무엇이 진실로 시험에 도움이 되는지 어느 것이 중요한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군 생활 동안 밥그릇만 빼고 음식물은 모두 먹어 치우듯이 책속에 있는 도표와 조문까지 가리지 않고 모두 외우다 시피 하였던 것입니다.

산속에서 길을 모르니 나무나 돌, 아니면 날아가는 새에게 물을 수도 없어 그저 내 마음에 물음표를 던져 가리키는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천방지축, 좌충우돌의 기행이 이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름대로의 성취감은 그야말로 일취월장과 같아 날마다 새로운 날에 새로운 지식은 끊임없이 나의 뇌리를 파고드니 감사와 기쁨의 연속인 것입니다.

정작 늦가을이 닥치면서 화덕에 연탄불을 피워보니 아랫목 일부를 제외하고는 온기가 별로 없었어도 그런대로 지낼 만하여 내 팔자려니 하고 그냥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곳에 빈방이 열 개도 넘었으니 화덕을 이리저리 점검을 해보아 불길이 제일 잘 닿는 방으로 이사를 하였더라면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참으로 아쉬운 감이 앞서고 지금도 그 성격 때문에 매번 고생을 하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병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머리가 복잡하지 않아서 좋은 점도 있긴 합니다.

그 해 겨울 스레트 지붕의 벽돌 건물에 불도 시원치 않은 방에서 말을 하면 하얀 입김이 나오고 모자와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얼굴도 시리고 손도 시린 방에서 참으로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길 잃은 햐 얀 비둘기 한 마리가 닭장에 들어온 것을 붙잡아 방 모서리 한 켠에 대를 만들어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밑에는 상자를 정사각형으로 짜서 똥 받이를 만들어 주고, 비둘기에게는 쌀을 먹고 물을 먹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하여 아예 쌀을 물에 적당히 불려 먹이자 잘 먹고 잘 싸고 잘살아 주었습니다.

내가 책상머리에 앉아서 긴 밤을 새고 있노라면 이놈은 대에 다소곳이 앉아 맑은 눈을 깜박이며 부리로 햐 얀 날개를 다듬곤 하였는데 몇 달이 지나자 순백의 날개를 뽐내면서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해 설날을 하루 앞두고 잠간 동안 게으름을 피우다 스스로 정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여 밤이 늦도록 책과 씨름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두시였는데, 온 세상이 눈으로 덮여있는 것은 물론이고 얼마나 많은 눈이 퍼붓는지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길은 희미한 윤곽만 보일 뿐이었음에도 부모님이 기다리는 집을 향하여 약 30리길을 걸어서 출발을 하였습니다.

가는 길목에 고목이 있어 눈길을 돌린 순간 나무에 매달린 사람의 형상이 시커멓게 보여, 누가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였을지도 모른다는 강박 관념에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하고 가까이 가보니 하필이면 고목나무 밑에 비석을 세워 놓아 옥개석과 받침대가 모두 눈에 쌓여 헛것이 보였던 것입니다.

수차례 넘어지고 길옆에 눈으로 메워진 구덩이에도 빠져보고 온갖 우여곡절 끝에 동 초등학교 부근에 도착을 하였는데 눈밭에 어떤 아가씨가 선물 꾸러미 등을 쌓아놓고 도로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나로서도 도움을 줄 방법이 없었고 지친 나머지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에 도저히 차가 갈수 없어 그곳에서 임시방편으로 내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도 도와주지 못한 안타까움에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합니다.

아무리 혹독한 추위도 봄이 오면 녹아내리기 마련인데 81년도 여름까지 만난을 무릅쓰고 끊임없는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면서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결전의 날을 1주일 정도 남겨두게 되었습니다.

마침 농협에서 근무하는 분으로 알고 있는 건물 주인이 유행병으로 “아폴로 눈병”에 걸려 여름휴가를 얻어 외딴집으로 왔는데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한시라도 시간을 쪼개 쓰던 중이라 마침 세수 대야에 맑은 물이 있는 것을 그대로 세수를 하고 말았는데 알고 보니 주인아저씨가 세수를 하고 버리지 않은 물이었습니다.

그날로부터 온 눈이 벌겋게 충혈 되고 도저히 책을 볼 수가 없어 신세 한탄을 하며 차마 포기할 수 없어 악전고투를 하며 시험을 치렀으나 1년간의 피눈물 나는 세월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중대한 일을 앞두고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약한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급하고 현실은 미약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생하시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보면 안타까움만이 더해가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님도 세월만 보내는 자식을 원망도 하는데 길조차 끊어진 산중에 버려진 미아가 되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나의 앞길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자신 만만 하였던 때로부터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마음과 몸을 굳건히 하여 스스로 서 있기에도 힘든 현실이 코앞에 닥치게 된 것입니다.
마침 눈이 온 세상을 덮어버려 길조차 끊어진 현실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인적마저 끊어진 깊은 산속에서 길을 모르면 주저앉아 울 수도 없고, 생을 포기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막연하게 기다릴 수도 없을 뿐 더러, 애써 구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줄 산이 아닌 것입니다.

임종을 앞둔 노모를 모시는 나뭇꾼 에게 한겨울에 어머니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자 아들은 잉어가 사는 연못에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였으나 얼음이 얼어 도저히 잡아낼 방법이 없어 망연자실하여 그냥 앉아 있었는데 얼마나 있었는지는 몰라도 엉덩이만큼 얼음이 녹은 구멍으로 때 아닌 잉어가 펄쩍 뛰어 올라 부모님께 효도를 다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애써 구하는 자에게 하늘의 은총이 내린 것입니다.

설악산의 오세암에는 슬프지만 무언가 구원의 빛이 엿보이는 전설이 있습니다.

식량이 떨어진 암자에 주지 스님이 애기 스님을 혼자 두고 식량을 구하러 산을 내려왔다가 폭설로 길이 끊어 졌음에도 애기 스님 때문에 무리하게 산을 오르다 스님이 조난을 당하면서 다리가 부러져 꼼작도 할 수 없게 되어 이듬해 봄에 눈이 녹아서야 어렵사리 암자를 찾아보니 5세의 애기 스님이 극도의 처절함을 극복하고 성불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의 인생노정에 앞길이 보이지 않고 불가항력의 장애물이 가려 나아갈 수 없는 현실이 닥칠지라도, 깊은 산정에서 저녁을 맞아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져 있다 할지라도 어차피 누군가에게 물어 답을 얻을 수 없다면, 까만 하늘의 별들을 좌표로 삼아 스스로 떨쳐 일어나 새로운 길을 내고 후세의 사람이 이를 본받아 진실로 넓고 크고 반듯한 길을 낼 수 있도록 희망의 씨앗이라도 뿌려두는 것입니다.

설사 미치지 못하여 중도에 그칠지라도 그동안 애써 지은 땀방울과 발자취가 새로운 길을 여는 다른 후학들에게 보이지 않는 흔적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인연의 끈으로 엮어진 하나의 햇무리로 떠오르는 찬란하게 빛나는 먼 훗날을 간절하게 기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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