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성묘 가는 길
  • 기사등록 2011-02-07 16:34:12
  • 수정 2014-11-25 00:07:54
기사수정
 
[전남인터넷신문/박영동]우리 한민족의 큰 명절이라면 “추석”과 “설날”일 것입니다. 명절 연휴 때만 되면 남녀노소, 빈부격차를 떠나서 약 2,000만 명에 달하는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조그만 반도에서 그나마 반으로 갈라져 있음에도 혈육의 정을 풀기 위하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고향으로 향하는 간절한 마음과 조상의 선영에 성묘하려는 지극한 정성이 어우러져 도로는 차량의 물결로 가득차고 산에는 세대를 초월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는 신묘한 장면을 연출하곤 하는데 이에 대한 근원적인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의문일 뿐 입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조상과 아울러 하늘을 섬기며 그 뿌리를 잊지 않고 이를 지켜가려는 의식이 강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다른 나라로부터 수없는 침범을 당하고 심지어는 을사보호조약에 의한 나라를 잃어버리는 치욕을 딛고서도 굴함이 없이 민족의 뿌리를 붙잡아 장구한 역사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더구나 해방을 맞이한 지 약 65년여 만에 세계 10위권을 넘나드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한국인이 경이롭게만 보일 것입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2011년을 맞이하는 신년연설에서 무려 한국에 대하여 다섯 차례나 언급을 하였다 합니다.

이것은 분출하는 한민족의 저력이 은연중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각인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여 무언가 경이적인 성과를 거두어가는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고통과 충돌이 있게 마련일 것입니다.

이따금 매스컴에서 우리들의 귀향 장면을 헬기로 촬영하여 끝없이 이어지는 차량의 행렬을 비춰주는데, 정작 그 행렬 안에 갇혀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엄청난 인내와 고통을 감내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의 인내심과 고통의 순간이 지나가면 꿀보다도 달콤한 만남과 섬김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인내는 쓰되 그 열매는 달다고 하였습니다.

단군 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의 경우에 백날동안 인내와 고통의 순간을 이겨낸 곰은 사람으로 환생하였지만 호랑이는 끝내 실패 하였다는 설화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고향의 선영에 성묘를 위하여 조상님들의 산소에 둘러선 사람들의 인생살이 또한 제 각각 기구하지만 이 자리에 서는 순간까지에는 수없는 우여곡절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에서 애써 달려온 사람과 가까운 지척에서 고향을 지켜온 사람, 휴가일수가 3일인 사람, 5일인 사람, 아니면 자신이 마음대로 휴가일수를 정하는 사람들, 개인적인 수입에 있어서도 각각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함으로 모두 자신의 처지에 비하여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상대방과의 처지가 같을 수 없기에 생각 또한 같을 수가 없어 서로 간에 간극이 생길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되어가는 과정을 되풀이 하는 것이 인생이라 할지라도 조상을 섬기는 마음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모두 다 지극한 정성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느끼는 인내의 아픔에는 각각 받아들이는 감이 다를 것입니다.

귀향하는 길의 차량 적체로 쌓여온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정성스레 음식을 장만하고 새벽잠을 깨우며 차례 상을 차리고 부랴부랴 음식을 정리하고 또다시 산소에 갈 음식을 조상님마다 각각 빠짐없이 준비하여 이곳저곳에 계신 조상님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하다보면 온몸의 피로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때로는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향의 어른들과 친지를 만나는 기쁨도 잠시 멀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손톱 밑에 가시가 들어 자꾸만 찔끔거리며 아파 고통을 호소 하였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나는 손톱 밑에 가시만 들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손가락이 절단 났습니다” 라고 하자, 순서대로 그 다음 사람은 “손목”을, 그 다음 사람은 “팔목”을, 그 다음 사람은 “어깨”의 통증을 호소하였다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손톱 밑에 가시가 든 고통은 당사자로서는 상당하였지만 다른 사람에 비하면 그다지 커다란 고통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아픔과 힘든 것만 이야기 하다보면 정작 다른 사람의 힘들어 함을 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시아버지는 성묘길에 며느리와 손녀딸이 힘들게 산을 오르는 것을 보고 정작 산소에 가지 못하고 갈등하다가 중간 지역에서 제를 지내고 왔다고 하던데 조상님에 대한 섬김과 며느리와 손녀에 대한 사랑의 애증이 갈등을 일으킨 대목으로 보여 집니다.

적어도 이제까지의 조상님들이라면 자손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흐믓하게 생각하며 기꺼이 그 제상을 마중 나와 받으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세의 부모가 명절을 보내려고 수도권으로 올라가는 신풍속도와 비슷한 현상으로 보입니다.

저 역시 예전에는 증조부 산소에 가서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려면 차로 약 40여분 정도 가서 눈 덮인 산길을 가파르게 올라 넘어지면서 약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려야 겨우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설날 차례를 마치고 세배하고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돌다보면 하루해가 꼬박 지고 말았는데, 지금은 조상님들을 모두 한곳에 모셔 성묘길이 한결 수월해 졌습니다.

성깔 있으신 어머님의 강단에 의하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참으로 다행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수월해진 성묘길 임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산소도 다녀오고 친척집에도 다녀오고 산에서 마주친 4촌들과 산상에서 술잔도 나누곤 하던 아기자기한 맛이 없어지고, 그나마 집안의 어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가신 후 한세대가 멀어진 후손들을 보고 말없이 누워 계신 조상님들이 쓸쓸하게 보이기만 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결국에는 몇 평에 불과한 산천에 누워야만 하는 숙명이 문득 안타깝기만 합니다.

조상님들을 섬기는 것이 후손들에 의한 봉양인 것인지, 아니면 조상님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아가는 것인지 쉽게 결론이 나지를 않습니다.

넓고도 넓은 세상에 가장 진화된 인간으로 태어나 오늘의 나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신 조상님들의 은혜는 혜량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은 가히 끝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맑은 옹달샘과 같은 마음으로 성묘를 하여야 할 것으로 보여 집니다.

조상을 모시는 길에 온갖 고난이 있고, 오고가는 길의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조상에 대한 빚을 갚는 최소한의 보은이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성묘 가는 길은 마음에서부터 천륜을 깊이 새겨가는 과정으로 인간으로서 할 바를 다한 충만감으로 당사자들에게 은연중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기에 살아계신 조상님께 세뱃돈을 받는 것과 같이 돌아가신 조상님들께도 보이지 않은 세뱃돈을 받으러 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또한 조상님께 땀 흘려 짓는 애타는 사모곡은 후손들의 보이지 않는 귀감으로도 길이 남게 될 것입니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jnnews.co.kr/news/view.php?idx=48627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확대이미지 영역
  •  기사 이미지 지리산 노고단에 핀 진달래
  •  기사 이미지 보성군, 연둣빛 계단식 차밭에서 곡우 맞아 햇차 수확 ‘한창’
  •  기사 이미지 강진 백련사, 동백꽃 후두둑~
한국언론사협회 메인 왼쪽 1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