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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산 따라 물 따라
  • 기사등록 2011-05-25 16: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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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4월이 지나가는 마지막 주 일요일에는 혼자서 배낭을 메고 옥녀봉과 양을 산을 오르내리며, 아무런 목적도 없이 무작정 걸어 하루해를 거의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약간 다른 길을 따라 새로이 걸어보니 비석도 넘어지고 산딸기만이 엉클어진데다 무심한 잡풀이 우거진 묘소들이 줄지어 자리한 길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부지런하게 다니던 길이 실처럼 이어지는 외딴곳을 걷게 된 것입니다.

순간 이 세상에는 산자와 죽은 자가 종이 한 장 만큼 공간의 차이를 두고 공존하여 살아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을 냉철한 이론으로 규명하는 과학적인 사고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의 한계를 고집하여, 종교에서 주장하는 내세와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는 상호간에 충돌하면서도 상대방의 주장에 대하여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반경에 등장하는 불교우화 중에는 장님들에게 코끼리를 손으로 만져보도록 하고 그 생김새에 대하여 답하도록 하였다는데, 열 명의 장님들이 각기 다른 답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장님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지전능하신 신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고 그에 대하여 진정한 신의 모습을 답하라고 하였다면, 열사람의 장님과 같은 발언을 하였을 것입니다.

저희가 서울을 가는데도 차량과 선박, 기차, 항공기뿐만 아니라 갖가지의 교통수단이 있지만 목표지점인 서울에 이르는 수단이 되는 것은 맞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기에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서는 굳이 배척할 이유도 없거니와 내가 주장하는 길만이 만고의 진리라고 우길 필요도 없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스스로의 처지에 맞는 길을 찾아 진리의 등불을 찾는 구도자의 신심을 고이 간직한 채 끊임없이 스스로의 마음을 닦아내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며, 평생 동안 인간의 도리를 밝히려고 전념하신 고승들께서 뿌려둔 주옥같은 법어와 일화를 통하여 높고도 깊은 뜻을 짐작하여 깨우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경허스님께서는 이따금 “단청불사”를 한다는 이유로 시주를 받아 주막에서 술을 즐겨 마셨다는데 시주 받은 돈으로 술값을 계산하는 스승에게 따지는 제자를 향해 스님은 자신의 얼굴이 붉게 변한 것은 단청이 잘된 것이며, 이제야 눈을 뜨게 되었다고 칭찬을 하였답니다.

육척 장신의 경허와 제자인 만공 스님이 탁발을 나가 시주받은 곡식을 메고 다니는데 자꾸만 만공스님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경허 스님이 갑자기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낙을 향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으며 입을 쪽 맞추고는 도망을 가므로 만공스님도 따라 도망을 가다가 추격권에서 벗어나자 바랑은 무겁지 않더냐고 물으며 “모든 것은 마음의 장난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합니다.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은 모두 결혼을 한 뒤에 출가를 하였으며, 슬하에 딸을 두었고 출생지가 똑같이 진주라고 합니다.

성철 스님은 평생 동안 한 벌의 옷으로 살았는데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가 될 때까지 스스로 빨래를 하였다고 합니다.

비구승들이 스님을 산중회의를 열어 주지로 모시려고 결정을 하였으나 거절하자니 율법에 어긋나고, 선승으로 공부에 방해 받고 싶지 않아 단 하루만 주지 방에서 자고는 벽에다 “走之(달아날 주, 갈지)”라고 써 놓고 야반 도주를 하였다 합니다.

스님께서 1993. 11. 4일 입적 하셨는데 유품으로는 누더기 옷 한 벌, 낮은 책상, 몽당연필, 검은 고무신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청담 스님께서는 상원사에서 수도를 하던 중 진주불교회의 초청을 받아 연화사에서 법문을 하게 되었다 합니다.

법회를 마치고 절문을 나서는데 어머니가 붙잡고 다짜고짜 속가로 가기를 원하여 할 수 없이 따라가게 되었는데 “내 다른 소리는 안 하마. 니 아들 하나만 낳아 놓고 가라”고 하자 도저히 거역할 길이 없던 스님은 어쩔 수 없는 파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스님은 아침 첫 닭이 울기 전에 속가를 맨발로 빠져나온 뒤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후 10년간 맨발의 수행을 하였던 것입니다.

스님이 그토록 연민의 정에 못 이겨 파계하면서 까지 낳은 아이는 속가에 남은 불행한 여인 3명에다 또다시 한명의 여인을 보태게 되었던 것입니다.

곡성에 있던 태안사를 향하던 23세의 전강 스님은 길을 걷던 중 깨달음을 얻어 춤을 추면서 깊은 밤 태안사 법당 앞에서 허리춤을 열고 천하가 다 들리도록 오줌을 누었던 것입니다.

밤중에 그것도 법당 앞에다 방뇨하는 미친 중을 향하여 대갈일성을 하는 스님에게 “허허 이런 어두운 놈을 보았나. 세상 천하 두두 물물이 다 부처인데, 부처 없는 곳이 어디 있느냐, 천지사방에 부처님이 계시는데 어디에다 오줌을 누겠느냐”고 하자 쫒아가던 스님은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만 것입니다.

역대 경전과 선사에 의하면 오줌을 누는 곳마다 부처가 있는 셈이니 법당 앞이라 해서 구별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고, 이세상의 모든 사물에 부처의 성향이 있다는 진리를 실제로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1925년 금강산 신계사 보운 암을 향하여 30대 후반의 사나이가 등에는 엿판을 메고 하얀 눈썹을 한 채 석두 스님을 찾는 기이한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석두 스님이 괴상한 행장을 한 중년의 사나이를 보고 신기하여 “유점사에서 여기까지 몇 걸음에 왔나요”라고 묻자 잠간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벌떡 일어나 큰 걸음으로 방안을 한 바퀴 돌아서서 “이렇게 왔습니다”고 대답을 하자 놀란 스님은 “유점사에 가기 전에는 무엇을 하였소”라고 묻자 “팔도강산을 엿장수로 떠돌았습니다”고 대답을 하였는데,

“무슨 일로 찾아 왔는고” 묻자 “스님 밑에서 머리를 깍고 불도를 공부하고 싶습니다”고 대답하여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는가”고 물으니 “서른 여덟입니다”고 대답을 하자 석두 스님은 절 앞에 있는 다락논으로 사나이를 데려가서는 손에서 바늘을 빼어들어 순간적으로 논에 바늘을 던져버리고는 “자네가 바늘을 찾아오면 내 머리를 깍아 줌세”라고 한 다음 방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사나이가 바지를 걷고 논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있다가 해는 지고 그로부터 사흘이 꼬박 지나간 다음 사나이는 문제의 바늘을 찾아 석두스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스님은 사나이에게 ‘학눌’이라는 법명을 내리고 출가를 시켰으니 훗날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긴 효봉 스님이었던 것입니다.

최근에 입적하신 법정 스님도 효봉 스님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누가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라는 열반 송을 남기고 1996. 10월 보름 입적 하였습니다.

불가의 고승들께서는 중생들을 제도하는 수많은 일화를 남기고 영원히 변함이 없을 금과옥조의 법문들을 후세에 유전 하였으며, 산 따라 물 따라 가는 여정을 통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무상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길이 빛나는 귀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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