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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눈물의 저울"
  • 기사등록 2011-06-09 16:34:41
  • 수정 2014-12-04 17: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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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 봄이 오면 만물이 약동하고, 여름이 오면 녹음이 한층 더 짙어질 것입니다.

온 세상을 이루는 물체에는 나름대로 존재의 법칙이 있을 것이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 각각의 추구하는 바가 다를 것이므로 행동의 양상이 조금씩은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의지대로 내버려 둔다면 질서가 없이 상당한 혼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벌이나 개미 등 곤충의 세계에서도 보이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세련된 질서가 있습니다.

이들이 이루어 놓은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미약하고 문란하게 보일지라도 알고 보면 인간보다도 훨씬 길고 정리가 된 질서가 깔려 있습니다.

인간의 생활에도 오랜 세월 축적된 질서를 문자로 완성해 놓은 법전이 있습니다.
법은 만인으로부터 평등하다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고 하면서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사망 하였습니다.

그만큼 사회의 계약을 철저하게 중요시 하여 자신의 목숨도 초개와 같이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순한 의도를 가진 위정자들에게 정당하지 못한 통치를 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악법은 법이 아닌 것입니다.

비록 질서가 중하다 할지라도 한사람의 무고한 희생을 강요하는 법은 존재가치를 잃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에는 법도 있지만 그 이전에 규범과 도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탕한 마음만 먹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도덕과 사회적 규범과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을 통틀어 ‘죄’라고 한다면 사람은 과연 평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갈지 의문이 되는 것입니다.

우연하게 본 ‘당 사주’라는 책에는 사람의 생년월일을 계산하면 스스로에게 맞는 사주가 나오는데, 저의 운명을 맞추다 보니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눈을 부릅뜬 장군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전생에 지은 죄가 팔만사천 관이 된다 ’고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문구였습니다.

전생을 살아가는 동안 수시로 지은 죄의 무게가 그렇게나 무거운데 지금 짓고 있는 죄의 무게는 또한 얼마나 될지 새삼 놀라울 따름입니다.

설사 그 정도에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알게 모르게 죄의 뿌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나 제갈공명등 대장군들과, 2차 대전의 히틀러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갔으니, 합법적이든 아니든 간에 그 죄의 무게가 얼마나 나갈 것인지, 어떠한 저울로 죄의 무게를 측정하여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이미 합법의 근거를 어디에 두었든지 사회적 규범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법이 있습니다.

법이 있으면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법이 사회적 현상에 대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절차를 완벽하게 거친 다음에 지킬 것을 강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에서 정해진 범위 내에서 합법적인 절차를 통하여 합리적인 사회적 합의에 이른 뒤 국회를 통하여 정당하게 통과되고, 대통령이 이를 공포함으로써 그 효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법의 제정 과정에서 국민들의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였으면 누군가에게는 희생을 강요하는 요소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각자의 이익을 앞세워 다수결의 힘 있는 세력이 의도한 대로 절차를 무시한 채 통과를 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법을 집행하거나 심판하는 사람들과 국민들에게는 참으로 머리 아픈 일입니다.

요사이 젊은 사람들은 사랑의 고백을 유별나고 보다 거창하게 한다던데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도 벌어진다고 합니다.

어떤 사나이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평생에 한번쯤 있을 진정한 고백을 위하여 멋있고도 기나긴 대사를 준비하여 결정적인 대답을 노리고 열변을 토하였는데, 상대방이 꿈에도 바라던 대로 이를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이므로 아직은 넘지 않을 선을 곧 바로 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뜻 밖에도 꿈같은 추억에 빠져 있던 사나이는 강간죄로 피소가 되어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나이의 독백이 너무도 오랫동안 이어지는 것에 상대방은 지루하다 못해 졸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동작을 취했는데 승낙의 표시로 오해를 하여 운명의 순간을 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때 과연 사나이의 죄를 어떠한 저울로 측량해야 되는 것인지 난감한 것입니다.

가끔 야외에 나들이를 나가다 보면 관상용 양귀비가 지천으로 깔려있는데 예전에는 양귀비 한포기가 마치
우리나라의 장래에 암적인 존재가 되는 것처럼 철저하게 단속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96년도 이맘때로 기억을 하는데 교통이 원활하지 못하여, 의료 혜택이 골고루 미치지 못하였던 도서지방에는 양귀비를 비상약으로 사용하려는 농민들에 의하여 은연중 재배가 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결같이 “소가 배탈이 났을 경우 직통으로 효과가 있어 단방 약으로 쓸려고 저절로 난 것을 뽑지 않고 그냥 두었을 뿐이다”는 대답이었지만, 한 송이의 꽃에서 약 10만개의 씨앗이 떨어지는 전파력 때문에 한그루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시골집의 뒤 텃밭에서 상당한 세력으로 뻗어 나온 양귀비를 발견하였는데, 알고 보니 단 3그루였음에도 너무나 잘 자라 부피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입니다.

문제의 식물을 수거하여 가려는데 그 집에 사시는 90여세를 바라다 보이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나타나 허리를 다쳐서 줄기를 돌로 찧어 아픈 곳에 바르면 통증이 가시는데 이것이 없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한사코 말리는 것입니다.

징역을 가도 좋으니 이것만은 놓아두고 가라고 갈고리 같은 손으로 손을 잡고서 애원을 하는데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할머니에게는 시골에서 허리의 통증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편이었는데 애써 뿌리치면서 그대로 수거를 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법에서 재배를 금지하였다 할지라도 마약이 아닌 실제 치료약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식물을 키운 할머니와 이를 저지하는 사람의 과오를 정의의 여신상이 들고 있던 눈물의 저울로 재보면 어떻게 될까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입장에서는 또한 묵인 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경비정을 타고 육지로 돌아오는 하늘에는 유난히 저녁노을이 빨갛게 타고 있었는데, 갑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오만가지 상념에 빠져 들다가 무릎을 치면서 차라리 돌려주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앞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돌려 줄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니 달리 길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고령의 할머니가 잡던 거친 손길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법칙을 지키기 위하여 정작 할머니의 건강과 나머지 인생을 아프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동안 이와 비슷한 경우가 2번 정도 더 있었는데 상대방들은 삶의 질곡에서 쓰라린 아픔을 겪었으며, 세월이 지나간 후 우연하게 현실을 목도하고는 가슴속으로 울고 싶은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지은 죄의 정상 참작과 미완의 죄에 대한 배려 사이에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 정의의 저울에도 눈물은 있는 것이 아닌지 궁금할 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이 지나간 세월동안 천역에 걸린 두 창녀를 향하여 “누가 저 여인들에게 돌을 던지겠느냐”고 반문하셨던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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