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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선택, 화백(和白)회의
  • 기사등록 2012-02-22 11: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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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살아가는 세상의 동반자인 벌이나 개미 등을 비롯한 곤충들 역사가 인간의 발자취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였다면 선뜻 믿어질지 의문이 갑니다.

어느 정도 정돈 된 질서와 법도에 의하여 삶을 영위하는 인간을 향하여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표현을 망설임 없이 구사하는데, 막상 곤충보다도 미약한 역사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인간이 체득한 고도의 지식에 의하여 벌이나 개미들의 사회생활이 의외로 정리가 잘되어 있으면서 우리보다 더 장구한 역사를 가진 사실에 대해서는 약간의 충격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날씨가 화창한 날에 우연하게 벌통의 출입구를 살펴보면 물구나무를 선채로 쉴 새 없이 날개 짓을 멈추지 않는 몇 마리의 벌을 발견하게 되는데 마치 우리의 관점에서 바라다보면 죄와 벌의 개념으로 체벌을 받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인간으로 말하면 어떠한 항목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는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도록 요령도 피우지 않고 똑같은 동작을 계속하는 존재에 대하여 흥미로움이 더해가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벌통 안에서 사육되고 있는 애벌레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면서, 집안의 온도를 낮추어 다른 개체들의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교대로 통풍작업을 하고 있었다면 공존공생의 사회성에 놀라움을 감출길이 없을 것입니다.

고생대에 있어서 잠자리의 크기가 몇 미터에 이르렀으며, 하루살이가 최소한 70-80센티미터나 되었음에도, 공중에 갑자기 출현한 익룡을 피하고 생존을 위하여 몸집을 줄이면서 천적이 멸종될 때까지 처절하게 종족을 유지한 의지는 그야말로 극적인 것입니다.

하루살이의 본능은 얼마나 급박하였는지 몰라도 아예 물속의 모래톱으로 파고들어 1,000일 동안 운둔의 생활을 하면서 약 25회에 걸쳐 허물을 벗고, 애벌레로 변신한 일주일의 마지막 날, 입도 없고 내장도 없이 더 이상 살수 없다고 판단한 하늘에 날아올라 자손 번식의 향연을 끝으로 생을 마감한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곤충들 삶 곳곳에 신비함이 널려있는 것은 도전과 응전의 논리가 얼마나 첨예하게 대립이 되고 있는지를 새삼스레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벌의 세계에서 종족 번식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여왕벌은 종자를 달리하여 태어나는 것이 아닌 똑같은 유충으로 3일간로얄제리를 섭취하는 일벌들에 비하여, 추가로 3일 동안을 더 섭취하면서 스스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강한 종족을 원하는 일벌들은 두 마리의 여왕벌이 태어나도록 하는 여건을 조성하여 두는데, 동시에 태어난 개체들은 생과 사의 결투를 벌이면서 이중에서 살아남은 존재만이 자신의 종족을 계속하여 번식시키고,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도 여왕벌이 한없이 높은 하늘로 날아 올라가면 수벌들이 떼를 지어 따라가는데, 맨 높은 곳까지 오른 건장한 개체의 강한 인자를 상대방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평생에 단한번의 교미로 수컷으로부터 500만-800만개의 정자를 받아들여 몸속에 보관하면서 6-7년 동안에 매일 같이 배란을 하는데 합하여 약 200만개 정도의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미물로 비추어지는 곤충의 세계에서도 기가 차는 과정을 통하여 현명한 시스템으로 무리의 우두머리를 추대하여 조직의 번성과 안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선사시대의 인간들에 있어서도 토굴이나 나무숲속에서 무리를 지어 살았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암컷과 수컷들이 군거를 이루어 살아가는 와중에서는 오직 어미만이 확실할 뿐 아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어 모계사회가 되었을 것이고 여왕이 종족의 최고 의사를 결정하는 정점에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후로 인간이 점진적으로 사회성을 정립하여 가면서 의외로 강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면 수컷을 중심으로 하는 방어 본능으로 생존을 위하여 가장 강력한 힘과 지혜를 갖춘 총명한 자를 왕으로 추대하는 절차가 필요 하였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로 예고도 없이 닥치는 자연 재해와 거대한 파충류들과 사나운 짐승들의 습격을 받으면 역경을 이겨내야만 하고,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제정일치의 강력한 군장을 세워 모든 부족의 뜻을 하나로 묶어 만장일치의 결론을 도출하여 장애를 극복하는 제도가 절실하였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국가의 중대사가 닥치면 경주근교 동쪽의 청송산, 남쪽의 오지산, 서쪽의 피전산, 북쪽의 금강산 등에 토론 장소를 마련해 놓고, 왕을 비롯한 문무백관들과 종교계의 지도자와 학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서로 간에 이견을 좁히는 마라톤 회의를 열어 한사람이라도 반대를 하면 안 되는 만장일치로 의사를 결정하는 신라 화백(和白)의 제도가 있었다 하는데, 그야말로 요즈음 다수결 원리보다도 훨씬 진전이 되었으며 민주적인 의사결정의 효율적인 절차였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화백제도는 신라시대의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까마득한 상고시대인 한웅시대로 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원동중의 삼성기 하편에는 태고 적부터 이어져온 삼신사상에 바탕을 두고, 최치원이 후세에 유불선을 통합한 신묘함으로 표현한 “소도(신채호 선생은 수두로 표현)와 관경을 관리하며, 벌을 다스리는 것을 모두 다른 무리와 더불어 서로 의논을 거쳐 화백을 하여 지혜와 삶을 나란히 닦으면서 온전함을 이루었는데 이때부터 구한(단군시대 구이의 전신)은 모조리 삼한에 통솔되고 나라 안 천제의 아들은 단군이라 불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암의 단군세기에서 “6세 단군 달문 임자 35년(기원전 2049년)에 뭇 한(汗)들을 상춘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에 제사케 하고 신지인 발리로 하여금 ‘서효사’를 짓게 하여 전파하시고는, 뭇 한들과 한국의 5훈, 신시의 5사를 가지고 끝없이 지켜나갈 것을 약속하고, 농사는 사람 사는 모든 일의 근본이요 제사는 다섯 가르침의 근원이라,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다스려 산업을 일으키며, 겨레가 소중함으로 죄인들을 용서하고, 아울러 사형과 남을 대신하여 책임지고 화를 입는 일(연좌제)을 없애고, 국경을 지키고, 화백회의의 결과를 공개하며, 서로 위하고 화합하는 마음으로써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으로 스스로의 힘을 길러 바로 어진 정치의 비롯함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위 기록 중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화백회의에 대한 문헌뿐만 아니라 단군세기의 군장들은 부자 세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수시로 5가의 화백회의를 통하여 합리적인 의결로 만장일치의 추대를 받은 흔적이 곳곳에 역력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21세 단군 소태 시절에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스스로 강력한 군사를 양성하여 귀방을 습격하여 멸망시키고 우현왕으로 봉해 줄 것을 수차례 사람을 보내어 청하였음에도, 이를 위험스럽게 여긴 단제가 거절하다 결국에는 승낙을 하게 되었는데, 이후 고등이 죽고 손자인 색블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면서 단제께서 서우여에 양위하는 것을 한사코 반대하던 색블루가 이에 반발하여 부여의 신궁에서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억지로 즉위하여 22세 단군에 올랐던 위기의 순간에도 화백회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 맥의 마한세가 하편을 살펴보면 “색블루가 아버지께서 이루어 놓으신 힘을 계승하여 대병을 장악한 후, 진한과 나머지 두 한을 모두 힘으로 무너뜨리자 전제가 할 수 없어 옥책과 국보를 전하고 스스로 붕어하셨는데, 백악산에 도읍을 하고 제위에 오르자 처음에는 모든 욕살들이 아무도 승복하지 않았음에도, 여원홍과 개천령들이 명령을 받아 저들을 설득하였고 이에 모든 욕살들이 빠짐없이 따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22세 단군 색블루의 즉위는 지금시대에 객관적으로 판단해보면 무력에 의한 강압적인 혁명으로 누가 보아도 정당성이 결여된 것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음에도, 서로의 이견을 조정하여 전제인 소태로부터 양위를 받았던 서우여의 반발을 무마하여 번한에 임명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아 위기를 극복해가는 과정이 참으로 극적인 반전으로 보여 집니다.

최선의 선택이 아니고 차선이나 차 차선의 결과라 하더라도 한사람의 반대라도 없어질 때까지 설득을 하는 인내와 배려의 과정을 거치면서 완벽한 합의를 도출하는 지혜가 한층 빛나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국가적인 대사에서부터 오가의 내부 문제나 각 부락의 대소사에 구성원의 의견을 수시로 교환하는 토론의 문화가 엄청나게 잘 발달이 된 개방된 사회였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상고시대부터 내려오는 조상들의 화백에 의한 의견수렴의 숙련된 과정이 새삼스레 신기하게 느껴지면서, 요즘처럼 사회 각계각층의 극화현상이 심화되어 갈등이 증폭되어 가는 현실을 극복하는 최선의 의사결정 방책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앞서기도 합니다.

고려 말에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와 비격진천뢰(오늘날의 수류탄), 신기전(다 연발 장거리 화살)등의 획기적인 신무기의 개발과 함께 신생국인 명나라를 응징하려 했던 최영 장군의 진취적인 기상이 새롭게 느껴지며, 위화도 회군을 기점으로 하는 민족의 폐쇄적인 기운의 후유증으로 산산이 분열된 민족의 정기를 어떻게 하면 하나로 모을 수 있을 것인지 고민이 되는 시점에 화백의 역할이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고도로 승화된 정신의 세계를 대변하는 로마에서 교황을 선출하는 만장일치의 과정은 마치 우리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하였지만 상고시대 제정일치의 군장을 추대하는 화백의 제도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요즈음 그리스와 이탈리아 등의 금융위기를 극복하려는 유로존의 정상들과 재무장관들은 급박한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일사불란하게 한곳에 모여 밤을 새우거나 13시간여를 쉬지 않고 계속하는 마라톤회의를 통하여 타협점을 찾아내고 있는데 참으로 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사회 각계각층의 갈등과 반목을 아우르는 과정에서 조상들께서 물려주신 양보와 타협의 과정으로 만장일치의 결과를 도출해내는 화백의 정신과 문화를 더 한층 발전시켜 오늘날의 제도로 활용한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한사람의 반대에도 의결이 되지 않았던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자리하였을 것인지도 궁금하거니와, 서로가 상대방에 대한 의사를 존중하고 이해하여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을 시기의 사람들이 느끼던 행복의 척도를 은연중 가늠해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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