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영겁의 세월, 시계추
  • 기사등록 2012-06-11 15:34:16
기사수정
 
[전남인터넷신문]이태백은 젊은 날 도교의 지도자 사마승정으로부터 선풍도골이 있다는 칭찬을 들은 것에 고무되어 자신은 등의 길이가 천리나 되는 대붕에 비유하고, 사마승정은 등허리에 있는 공터의 지름이 약 1만9천리나 되는 희유조에 비유를 하여 대붕부라는 시구를 남기게 됩니다.

“날아가는 물길이 삼천 척” “백발이 삼천 장”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가 저녁에 백발이 되었다”는 표현 또한 이백의 허장성세의 과장법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중국의 한족들은 예로부터 이러한 과장법에 익숙한 표현을 자주 사용해오곤 하였습니다.

역대의 미인들 중 “서시가 손수건을 물에 담그자 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멈추어 그대로 가라 앉았다 (침어)”

“왕소군이 거문고를 타자 날아가던 기러기가 나는 것을 멈추어 떨어졌다. (낙안)”
“초선이 달을 보자 부끄러워 구름 뒤에 숨었다. (폐월)”
“양귀비가 함수 화를 만지자 잎을 말아 올려 가렸다 (수화)”는 표현 또한 같은 맥락이 될 것입니다.

중국인의 과장법과 역사를 왜곡하는 습관에 의하여 우리 조상들의 찬란하였던 고대 역사는 시대를 거듭할수록 그 영역이 축소되고 주객이 뒤바뀌는 비극을 되풀이 하였던 관계로 지금도 계속하여 표류 중에 있는 실정입니다.

단군설화에 있어서의 호랑이로 묘사가 된 호족의 후예로 열양(황하의 북쪽)의 욕살 색정이 있었다는데, 호전적이고 약탈의 습성이 있어 3세 단군 가륵 갑진 6년(기원전 2177년)에 약수로 옮겨서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엄명을 하였다가 늦게 이를 용서하여 주시고는 그 땅에 봉하자, 이후로 부족이 번창하여 흉노가 되어 중국의 기나긴 역사에 있어 한족의 크나큰 근심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몽골 초원에서 일어난 징기스칸의 팽창정책에 밀려 유렵으로 대이동을 하였던 훈족의 조상이기도 하였는데, 훈족의 동 고트 침략에, 동 고트의 서 고트에 대한 침공, 도미노의 이동으로 서 고트의 게르만 침공에 이어, 게르만의 용병인 오토아케르가 서 로마제국을 멸망시킬 때까지 실로 훈족의 존재는 세계역사의 획을 새로이 각인 시킨 것입니다.

당시 상고시대의 지도층들은 산세가 좋은 언덕에 박달나무를 심고 “소도”와 “경당”을 설치하여 정신적인 수련과 무예를 끊임없이 연마하여 온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는 역량을 쉬지 않고 단련하였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제정일치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단제들은 고도로 승화된 정신의 경지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통치력을 발휘하여 수없는 제후국을 거느리고 상호간에 침략과 전쟁을 억지하고 평화를 위한 사도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상고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대륙의 드넓은 평야지대에는 황하 강을 비롯한 각종 지류들의 범람으로 토지는 비옥하였으나 백성들의 삶이 한시도 안정될 날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백성들의 척박한 환경을 염려하였던 요임금은 ‘곤’을 기용하여 치산치수의 노력을 펼쳤으나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순임금의 시대를 맞이하였는데, 순임금은 치수의 업무를 태만히 하였던 ‘곤’을 우산에서 참형 하고 그의 아들인 ‘우’를 기용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를 가엾게 여긴 단제께서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팽우가 완성한 치산치수의 법을 전수하고, 물과 사람을 다스리는 세 가지 보물을 전해주도록 하여, 이에 감복한 ‘우’가 치산치수에 전념하여 드디어 황하 강 유역의 홍수를 다스린 것으로 보여 집니다.

도산의 회맹 이후, 단제께서는 순임금에게 5년마다 치산치수의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시었으며, 순임금은 네 번이나 동쪽의 천자를 알현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단제 신채호 선생님도 이점을 조선상고사에 명쾌하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치우천왕의 후손인 치두남을 번한에 임명하여 순임금의 정치를 감독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며, 한족의 조상인 고대 하, 은, 주의 황제들은 동쪽의 천자인 단제의 통제를 받는 구이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은나라의 왕, 탕이 하나라의 왕, 걸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격분한 걸이 군사를 일으키면서 구이의 군사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크게 호응하는 것을 보고, 재상 이윤은 탕 임금에게 사죄를 하고 걸 임금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간하였다가, 다음에 걸 왕이 또다시 은나라를 침범하려 구이 군사들의 호응을 유도하였으나 응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드디어 은나라의 탕 임금이 걸 왕을 군사로 들이쳐 멸망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중국의 가장 중요한 경전 중 삼경으로 불리는 서경에 정확하게 묘사가 된, 구이의 군사동향에 따른 탕 임금의 처신은 스스로 단제들의 통제 하에 있었던 사실을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북방 산악지대에서 삶의 터전을 잡았던 흉노들은 식량과 물자의 부족함을 평야지대의 한족을 공격하여 수시로 약탈하였던 것으로 보여 지는데, 역대 왕조의 크나큰 우환 덩어리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를 방비하기 위하여 시작된 거대한 토목공사로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그 시대의 열악한 장비와 인력으로 만리나 되는 장성을 쌓았다고 하는 주장 또한 어느 정도는 원초적인 과장이 되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당시 만리장성의 축조를 서둘렀던 진시황이 세운 나라의 명운이 고작 15년에 그쳤으며, 이후 이를 전수 받아 장성을 관리하였던 왕조들 또한 크게 성하지 못하여 엄청난 토목공사를 감당할 능력이 부족하였던 것으로 추정이 되고, 대부분의 장성들은 명나라 때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동안 중국이 주장하는 만리장성의 길이가 2000년도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자위관에서 하북성의 산해관까지 약 6,000킬로미터에 이르던 것을 2009년도에는 압록강 하구의 고구려가 쌓은 박작성까지 연장을 하는 억지 주장을 통하여 약 8851.8킬로미터로 크게 늘려 놓았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불과 채 3년도 못되어 수세기에 걸쳐 정해진 만리장성의 길이를 서쪽으로는 신장 위구르 지역까지 연장시키고, 동쪽으로는 고구려, 발해, 거란, 여진족이 쌓은 성곽을 모두 포함시켜, 총길이 약 21,196.8 킬로미터라고 발표를 하였습니다.

새의 등허리 공터를 일만 구천리로 표현을 하였던 중국인들이 당시에도 만리로 표현을 하였던 장성의 길이를 자신들의 주장에 따라 산술적으로 계산을 해보면 약 5만 3천리나 되는 역사의 잣대로 무려 다섯 배나 늘려 놓은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이면에는 자신들 역사의 무대를 무한정 늘려 발해와 거란, 여진 등의 역사를 자신들의 것으로 예속을 시키고, 혹여나 북한의 붕괴로 인하여 조만간 있을지도 모르는 영토분쟁에서 유리한 거점을 차지해 보겠다는 동북공정의 심산이 깔려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약 5만 리나 되는 장성을 쌓아서 막아야만 할 정도로 그들을 두렵게 하였던 세력의 실체가 누구였는지도 의심 없이 밝혀야 할 것입니다.

수세기에 걸쳐서 한족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수많은 종족들의 복합적인 역사와 그 흔적들을 함부로 말살하거나 조작하는 일은 마치 손으로 태양을 가리는 것과 같아 나머지 세대의 삶과 정신적인 뿌리를 흔들어 엄청난 폐단이 뒤따를 것으로 보여 집니다.

지금도 상고시대의 동양사회 역사가 애매모호하게 펼쳐지면서 주변국이 제 각각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장만을 되풀이 하고, 조그만 영토의 분쟁을 일삼는 행위는 다가오는 세대를 대비하는 건전한 자세가 결코 아닌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토록 기나긴 장성의 안쪽 역사만을 염두에 두고 자신들의 울타리를 무한정 늘려 간다면 울타리 너머의 거대한 위협 세력에 의하여 전전긍긍 하였던 스스로의 자기 비하에 대해서는 해명 할 수 없는 자가당착에 부딪히고야 말게 될 것입니다.

중국의 삼황인 복희, 신농, 황제 헌원과 오제들도 모두 동이족이라는 설이 있음에도 마치 우리의 역사를 자신들이 이룩한 일부 변방의 역사로 취급하는 데는 그저 놀라울 따름인 것입니다.

단군시대의 처음에는 광대한 영역을 한사람에 의하여 통치하기에는 무리라고 판단을 하여 진한, 마한, 번한의 삼한으로 분리하여 다스리다가 나중에는 그 관경을 종전의 그대로 하고 진, 막, 번으로 명맥을 이어 삼조선 시대로 계승하였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 중 번 조선은 주 ‘무’왕에 의하여 멸망한 은나라의 마지막 황제 ‘주’의 시대에 재상이었던 ‘기자’가 동쪽으로 망명을 하는 과정에서 번조선이 연나라 사람 배도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해 있을 당시 5,000인의 제자와 함께 위기를 구해준 일이 있었다 합니다.

이를 기화로 번 조선에 의탁하여 생활을 하던 기자가 기원전 263년 단제 수한이 후사도 없이 사망을 하는 와중에 기후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신하고 있었는데, 연나라가 또다시 왕이라 칭하고 쳐들어 오려하므로 기후 또한 번조선 왕이라 칭하여 사실상 이때부터 번조선의 명맥은 끊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기욱과 기석, 기윤, 기비(기원전 172년)가 순차적으로 단제에 올라 번조선의 명맥을 이어가는 동안, 막(마한)조선은 기원전 238년 47세 단군 고열가 께서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시므로 오가와 함께 6년간을 서로 협력하여 존속하다가 진 조선이 진시황에 복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원전 232년경)

기원전 239년 4월8일 해모수가 처음으로 웅심산에서 내려와 군대를 일으키고 북부여를 세웠는데, 번조선 왕인 기비와 제위를 찬탈하려 는 모의를 하고 진조선의 도성인 백악산을 습격해 점령하여 천왕랑이라 칭하고,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았다 합니다.

기원전 146년경 기준이 번조선 왕에 즉위하였는데, 떠돌이 도적 위만에게 속아 나라를 잃고 말아 형식상으로 삼조선의 명맥은 이때에 끊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막 조선, 진 조선을 병합한 진시황은 자신만의 새로운 역사를 세우기 위하여 기존에 있던 우리 상고시대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서적과 학자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말살하는 작업을 서둘렀는데, 분서갱유라는 거대한 역사의 왜곡작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진나라가 멸망한 이후부터 약육강식의 처절한 열국의 쟁탈전으로 인하여, 아비와 자식과 형제와 제후들이 뒤엉켜 피로 얼룩진 춘추 전국시대를 맞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도로 승화된 정치는 실종이 된 것으로 고대 역사의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중국은 동북아의 소수민족이나 약소한 국가들의 주권을 빼앗아 강제로 병합하여 거대한 제국을 이룩하고 세계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야욕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만, 내부에서부터 일어나는 제국의 분열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커지면 갈라지고 갈라지면 분열하게 되는 자연의 이법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더불어 살아가는 미래의 역사를 준비하는 전향적인 자세로 의식의 창을 과감하게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연속하여 일어나는 모든 사실 들이 하나 둘씩 모여서 도도한 역사의 물결을 이루고 있지만, 이들이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후손들의 것임도 잊지 말아야 하기에 한 치의 가감도 없이 온전한 상태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중국대륙 곳곳에 산재하여 있는 상고시대의 한, 중, 일. 역사의 뿌리를 찾아 진정한 동반자의 자세로 새로운 날의 동북아 역사를 정립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입맛에 맞추기 위하여 거대한 역사의 시계추를 함부로 멈추게 한다면 한, 중, 일을 포함한 동북아의 역사 뿐 만 아니라 세계 인류 역사의 생명력을 단절하는 위험스런 결과가 초래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역사는 끝을 모르는 진동으로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동안에야 우리들의 진정한 뿌리를 밝혀, 인류가 가야할 올바른 길을 갈수 있을 것으로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 이 암의 단군세기, 이 맥의 삼한 관경본기, 휴애 거사 범장의 북부여기 참조.)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jnnews.co.kr/news/view.php?idx=77304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확대이미지 영역
  •  기사 이미지 김이강 서구청장,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 참석
  •  기사 이미지 보성군, 보성의 소리를 세계의 소리로! 제26회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시상
  •  기사 이미지 오늘은 우리들 세상
한국언론사협회 메인 왼쪽 1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