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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늪, 성(性)
  • 기사등록 2012-08-08 14:4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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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동물과 식물들의 생명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흙과 강렬한 태양빛을 비롯하여 물의 3박자가 어우러져야 비로소 자연스런 생명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전에 생각해 보지도 못하였던 가뭄과 더위가 갑자기 찾아오면서 우리생활의 기반이 송두리 채 흔들리고 그 대책이 묘연한 상황에 부딪히기도 하였습니다.

인간은 대자연의 변화에 나름대로 적응하고 이에 대하여 끊임없는 대비를 하면서, 보이지 않는 투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자연의 조그만 배려가 없는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의 연약한 존재임을 실감하였습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생명의 자리를 다투는 약육강식의 투쟁과 자손을 번성하여 종족의 번영을 꾀하는 욕망의 굴레는 더욱 강력한 의지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자연으로부터 내려지는 원천적인 에너지의 방향이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하여 그 혜택을 조금이라도 거두어 버린다면 그 생명의 향연을 지속적으로 이어 가기에는 힘이 들 것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먹이사슬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인간에게는 에너지의 끝없는 충전작용으로 식욕이 있으며, 자손을 번성하고 삶의 희열을 뒷받침 해주는 성욕이 있으며, 보다 뜻있고 의미 있는 것으로 승화시키는 명예욕이 있습니다.

위 세 가지 욕망이 꿈틀거리면서 서로 보이지 않는 조화를 이루어 결과적으로는 우리 생활의 근본을 이루는 삼두마차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조물주께서 인간에게 성의 결합에 의한 찰나에 가없는 희열의 감흥을 부여한 것은, 혹시라도 삶의 다른 기쁨에 눈이 팔려 자손의 번식에 게으름을 피울지도 모른다는 고심의 흔적이 엿보입니다.

단 한 번의 희열로 만족을 얻도록 하는 대신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 끝없이 계속되는 욕망의 굴레를 씌워, 심지어는 자신의 몸을 버릴지라도 자손을 번성 하는데 소홀함이 없도록 참으로 견고한 집착을 접목해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정작 필요한 순간의 성적인 충동은 참으로 좋은 기능을 발휘하게 되지만, 필요를 넘어서 절제의 한계를 넘치는 과다한 욕망의 표출은 우리 사회의 부작용을 낳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빠져드는 욕망이라는 늪이자 삶의 활로가 되는 이중적인 구조로 생존에 필요한 식욕을 채우고 난 뒤의 자연스럽게 따르는 성욕은 삶의 축복이자 때로는 천역으로 비추어 보일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위와 같은 성의 문제에 대하여 고도로 순화된 정제의 과정을 거치고 세련된 의지의 통제를 바탕으로 기본적인 품위를 갖춘 성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을 원하는 집념은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정당하여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점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여 질 것이지만, 다른 상대방이 성의 욕망을 과도하게 분출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참으로 저속하게 보여 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성의 문제에 집착을 하게 되면 로맨스이고 상대방이 저지르면 불륜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태초부터 무분별한 성의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하기 위하여 팔조 금법을 제정하였는데, 음란한 행동을 하는 자는 태형으로 다스리는 과정에서, 정숙한 여인의 모습과 엄격한 선비의 기상이 오랜 전통으로 형성되어 체면과 수줍음의 문화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고대로부터 안방에서 일어나던 이전투구의 투쟁 양상은 사랑과 증오의 대립에서 끝없는 악연과 집념의 화신으로 변한 복수극으로 표현이 되기도 하였으며, 신분과 남녀노소를 뛰어넘는 성문화의 해학과 골계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도록 음성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성문제에 있어서의 끝없이 굴러가는 물레방아는 차면 기울고 기울면 다시 채우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필연적인 해소의 과정이 따라야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사는 세상에는 성문제로부터 자유스러울 정도로 환경이 잘 정비된 사람도 있는 반면, 성을 해소하는 상대방이 있음에도 스스로의 욕망의 폭이 커서 억제가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아예 성문제에 대한 해소의 길이 막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풀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형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태초부터 부분적으로 있어온 성 매수의 관례를 넘어서 우리나라는 수년전, 성의 매매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어 시행을 하였습니다.

일부 생활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성매매가 자유로운 외국으로 진출하여 자신들의 볼일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성의 충동을 해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상당수 저 소득자이자 능력이 부족한 막장 형태의 사람들에게는 성욕의 해소 방안이 차단이 되어 그 해소를 서두르다가 억제하지 못하고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성욕의 문제는 성인의 의식구조와 성숙한 인간의 의식으로 스스로 해소하고 자제할 줄 알아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동반하고 있음에도, 욕망이라는 전차와 같은 성에 대한 집착은 어느 정도의 해소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누구도 자유스러운 상태가 될 수 없어 끈적끈적한 힘든 수렁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의 성품과는 다른 인간에 대하여 악의 화신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선을 부르짖는 양심의 소리를 말살하고 급기야 악령의 구렁텅이로 스스로를 몰아넣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어린 자식들을 키우는 부모들이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사회적 환경 때문에 어린 학생들을 성폭행범의 마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학교보안관이나 학교지킴이라는 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그만큼 실정법이 엄연하게 살아 시행되고 있는데도 법을 능멸하여 성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발호가 그만큼 심하였다는 반증이 될 것입니다.

급기야는 궁여지책으로 위와 같은 제도를 신설하여 전국적으로 수천 명에 달하는 경찰, 군인, 교사 등의 직업에 종사하였다가 퇴직한 사람들을 상대로 어린 새싹들 보호자의 책무를 부여 하였음에도, 오히려 그 사람들에 의한 성폭행 사건이 빈발하게 된 것입니다.

때로는 유치원 선생님이나 학교 선생님의 어린학생을 상대로 하는 성범죄가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척박하다는 사실을 낱낱이 보여주는 일이고, 더구나 치료를 의탁한 의사나 정신적인 가르침을 구하는 목사를 비롯한 성직자등에 의한 성범죄가 발생하는 것을 살펴보면 우리사회의 도덕적 의식이 이미 위험스런 수위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무언으로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개인 성생활의 자유를 보장 받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마저 경시되고 있는 현실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가 무언가 중대한 결함에 빠져 회복하기 힘든 지경에 이른 것으로 보여 집니다.

포화상태로 까지 보이는 인류의 번성으로 각 지역마다 사람들로 넘쳐나면서 끝없는 욕망의 충돌이 일어나면서 그야말로 세상의 질서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심히 염려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짐승과 사람은 모두가 이 세상을 같이 살아가는 동반자적인 생명체로서 짐승의 의식을 ‘영’이라 하고 사람의 의식은 ‘혼’ 이라고 칭하는데 둘을 합하여 “혼령”이라고 합니다.

인간보다 한 단계 낮게 평가되는 짐승의 영에게도 식욕이나 성욕, 명예욕이 존재하는 것은 마찬가지가 될 것 입니다.

동물의 세상에서도 자손을 번식하려는 집념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성행위에 희열이 존재하면서 인간과도 같은 집착이 있음에도, 동물의 세계에서는 상대방이 거절하면 강탈을 하는 대신 아양을 부리는 등의 수용을 하고, 거부하는 상대방의 생명을 빼앗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성과 생명에 대한 문화는 이따금 너무나도 잔인하고 극단의 이기적인 양상으로 표출이 되어 사회를 혼란스럽게도 만드는 것입니다.

보도매체들은 인간으로서 도에 어긋나는 범죄가 발생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투어 흥미를 일으키고 그 원인과 납득의 논리를 찾기에 앞서, 천륜을 송두리 채 버린 패륜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으로 몰아가면서 쉬지 않고 거듭하여 방영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일부가 마치 전부인 것처럼 단정을 하고, 이렇게 되면 사람이 살수 없는 세상이 된 것처럼 덩달아 부추기는 것입니다.

정말로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만이 자신들의 자녀와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나갈지 전전긍긍하면서 갈수록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얼마 전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적절한 행위로 인하여 온 미국사회가 벌집을 쑤셔 놓은 형국으로 장기간에 걸쳐 청문회와 여론재판을 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정작 그러한 상황에 직면한 미국인들은 정말로 자유롭게 개방된 성생활을 마음껏 영위하는 나라의 국민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누리면서도 상대방의 성문제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문제를 삼은 하나의 전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프랑스인들은 사람의 배꼽 밑으로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는 남자이건 여자이건 공식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합니다.

프랑스인들은 성의 문화에 의해서는 자유로운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으며, 누구든지 떳떳하게 향유하면서 공생해가는 문화를 형성하여 어느 정도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므로 사회적인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여 지는 것입니다.

냉정한 마음으로 돌아가 보면 원천적으로 성의 문화를 즐기는 것은 한편으로 조물주의 섭리에 부응하는 일이기도 하며, 일정한 룰의 뒷받침이 있는 가운데 서로가 정도껏 즐긴다면 참으로 바람직한 모습이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과 동족상쟁의 전란을 겪어가면서, 급속한 산업화의 물결 속에 한때는 성매매의 문화가 크게 발달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왜곡된 성매매 시스템의 불법이 사회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자의적인 인간의 의사와는 상관이 없이 인신을 억류하여 강제로 성매매에 내세우고 이익을 착취하거나, 행동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은 당연히 지탄을 받고, 강력한 처벌을 받았어야 마땅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성매매 피해자로 분류되는 사람 중에는 성실하게 직업의식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부모님의 치료비와 동생들의 학비를 부담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을 필요로 하는 수요와 공급의 정당한 합치는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생산적인 기능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체의 자유에 부합하는 성생활의 자유로운 향유를 매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용납이 안 된다는 사회적인 여론이 거세게 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우리나라는 합리적인 성매매에 대한 의견의 개진이 금기시 되고, 개방적인 성매매 의견의 퇴출로 인하여 전반적으로 성매매를 금지하여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강력한 법률의 제정으로 성문화의 위축이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성의 분출이 막혀버린 사람들은 실정법의 처벌이 두려워 해소 방법을 찾다가 궁여지책으로 감시의 사각지대이자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느껴지는지는 모르지만, 사회적 약자를 향하여 자꾸만 마수를 뻗치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 예수님께서는 천역에 걸린 두 명의 창녀를 향하여 누가 저 여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하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절에도 성매매의 습성이 버젓이 존재하였기에 창녀라는 직업이 있었으며, 그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두 여인의 인생이 속절없이 시들어 갔던 것입니다.

그러한 직업을 원하였던 원하지 않았던 간에 그러한 피해자를 만든 모든 사람들의 작위적인 행위가 때로는 악령으로 향하였던 사람들의 범죄를 사전에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물은 막으면 고이고 고이면 얕은 곳을 뚫어 낮은 곳으로 흘러가면서 그대로 멈추는 법이 없는데도, 성의 물꼬를 막고서 둑을 무너뜨리는 충동을 경멸하고, 만약에 또다시 선을 넘는 사례가 발생하면 보다 강력한 처벌을 하겠다는 엄포를 통하여 성범죄를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원초적인 욕정을 막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가버린 사람들에게 아무리 품위와 점잖은 말로 설득을 한다 해도 납득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고양이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 생쥐들의 고민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법무부에서는 성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성범죄를 예방하려는 행정 당국과 우리 부모들과 사회활동을 펼치는 사람들의 피해 예방 노력은 실로 눈물겹게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동안 성범죄자의 신상공개와 전자발찌를 채우고 이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그 예방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성희롱과 성추행을 넘어선 성범죄의 방지를 위하여 실로 다각적인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고도 성범죄의 문제가 줄어들지 않고 늘어만 가고 갈수록 흉포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더 이상의 방지를 논하는 것이 한계점에 이른듯하여 현실적인 자괴감이 앞서기도 합니다.

무언가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를 파헤쳐 조금이라도 이 난국을 해소할 수 있는 묘책이 있는지를 백방으로 살펴 처방을 서둘러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강력한 처벌과 응징이 기다리고 있는 욕망의 늪을 향하여 돌진하는 성범죄자들에 대하여 채찍을 넘어선 칼과 방패를 휘두르면서도, 한편으로 갈팡질팡 해매는 욕정의 화신들이 잠간 동안만이라도 생각을 돌릴 수 있는 사회적 공약에 의한 쉼터를 지어주는 것도 무지몽매한 충동을 막아내는 하나의 방편이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성(性)은 ‘사람이나 사물 등의 본바탕’ 이라는 또 다른 뜻도 있다는 의미를 되새겨 원죄의 굴레를 해소하려는 숙려의 과정을 거친 눈물겨운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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