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룡 jnnews.co.kr@hanmail.net
[전남인터넷신문]와인은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얼굴을 드러내는 술이다. 막 병입된 와인은 영(Young)이라 불리며 과일향이 싱그럽고 색이 선명하다. 시간이 지나 머추어(Mature) 단계에 접어들면 향과 맛이 조화를 이루고, 오래 숙성된 에이젯(Aged) 와인은 강렬한 무게와 긴 여운으로 사람을 압도한다.
이처럼 와인은 시간의 흐름(숙성 단계)과 바디감(무게와 질감)이라는 두 축을 통해 맛의 세계를 세밀하게 나눈다. 라이트 바디(Light Body), 미디엄 바디(Medium Body), 풀 바디(Full Body)라는 표현은 알코올 도수나 향의 강도를 넘어, 입 안에서 느껴지는 농도와 질감, 풍부함을 설명하는 보편적 언어다.
와인의 이 언어는 발효 음식인 홍어에도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나주 홍어는 시간이 흐르며 발효 정도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데, 이를 와인의 바디감에 빗대면 더욱 세련되고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홍어의 발효 단계를 여린 발효–무르익은 발효–깊은 발효로 나누고, 각각을 라이트–미디엄–풀 바디에 대응시켜 이해할 수 있다.
여린 발효(Soft Fermentation / 初發)는 라이트 바디에 해당한다. 발효가 막 시작된 홍어는 향이 은은하고 신선하다. 살결은 단단하고 아삭하여 바다의 생동감을 품고 있다. 라이트 바디 와인이 청량하고 산뜻한 인상을 남기듯, 여린 발효 홍어도 초심자에게 부담 없이 다가온다.
무르익은 발효(Moderate Fermentation / 中熟)는 미디엄 바디와 닮았다. 발효가 적절히 진행되며 향과 맛의 균형이 잘 잡히고, 톡 쏘는 향은 은근히 퍼진다. 살과 껍질이 어우러져 쫄깃하고 부드러우며, 많은 애호가들이 선호하는 단계다.
깊은 발효(Deep Fermentation / 圓熟)는 풀 바디와 대응한다. 장기간 발효된 홍어는 강렬한 향과 깊은 풍미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코끝을 찌르는 자극은 혀와 머리끝까지 퍼지고, 긴 여운을 남긴다. 풀 바디 와인이 한 모금만으로도 압도적인 경험을 주듯, 깊은 발효 홍어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문화적 체험이다.
이처럼 홍어 발효를 와인의 바디감에 대입하면, 단순히 “알싸하고 톡 쏘는 맛”“강하다”“찌린다”라는 언어를 넘어 발효 음식으로서의 스펙트럼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와인이 세계인의 공통 언어가 되었듯, 홍어도 발효 단계를 체계적으로 표현한다면 전라도의 전통 음식을 넘어 세계 발효 문화 속에서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향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는 태도가 아니다. 와인이 강렬한 타닌과 묵직한 향을 문화적 자산으로 만든 것처럼, 홍어 역시 그 향을 어떻게 즐기고 해석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이처럼 와인과 홍어는 각기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모두 시간의 힘을 통해 날것에서 예술로 승화한다. 와인의 영(Young)은 청춘의 생동감을, 머추어(Mature)는 중년의 균형을, 에이젯(Aged)은 원숙한 삶의 내공을 보여준다.
와인이 이미 세분화된 언어로 숙성 단계를 기록하듯, 홍어 역시 발효의 정도를 설명하는 언어를 마련한다면 그 가치는 더욱 고급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나주 홍어를 와인의 맛 언어로 풀어내면, 궁금증을 자극해 맛을 음미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홍어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
더 나아가 소비자가 원하는 발효 단계를 선택해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생긴다. 이는 곧 홍어의 판매 증가와 함께 기호 맞춤 소비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면서 나주의 새로운 미식문화로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5. 프랑의 요리 맛 언어로 풀어낸 나주 홍어의 풍미.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07).
허북구. 2025. 이탈리아 음악 용어로 풀어낸 나주 홍어의 풍미.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05).
허북구. 2025. 국악의 음색으로 풀어낸 나주 홍어의 맛.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