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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한정식 정원과 순천만국가정원 농업 칼럼니스트 농학박사 허북구 2025-12-07
김승룡 jnnews.co.kr@hanmail.net

[전남인터넷신문]음식문화가 발달한 지역은 대개 인구와 교통을 기반으로 한 안정적 수요가 존재하고, 자연환경과 전통시장을 통해 식재료 공급이 꾸준히 이루어지며, 그 속에서 조리 기술이 세련되게 축적된다. 순천은 이 세 조건을 모두 갖춘 남도의 대표 도시다.

 

조선 시대 순천 일대에는 순천부(後에 순천도호부)가 설치되어 전라좌도 동부 지역을 관할하는 중심 고을로 기능했다. 1413년 도호부로 승격된 이후 순천은 행정·사법·군사를 아우르는 지역 거점으로 자리 잡았고, 이는 자연스럽게 고급 음식문화의 지속적 수요로 이어졌다. 향교·서원·반가문화가 발달한 순천은 일찍부터 격식 있는 상차림, 절기 음식, 다식 문화 등이 생활 속에 뿌리내린 고장이다.

 

근대로 들어와서도 순천은 전남 동부권의 교통·행정·교육기관이 집중되었고, 오늘날에는 광양제철과 여수산단 등 인근 산업단지 종사자들이 모여 사는 생활 중심 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도시적 수요는 한정식의 품격을 높이고 전통 상차림을 현대적으로 확장하는 기반이 되어 왔다.

 

무엇보다 순천 한정식의 바탕에는 ‘식재의 정원’이라 할 만한 풍요로운 자연환경이 존재한다. 평야·갯벌·하천·산지가 한 도시에 공존하는 드문 지형은 산·들·바다 식재가 모두 생활권 안에서 순환하는 구조를 만든다. 동천과 순천만을 따라 펼쳐진 생태축은 들나물·해산물·곡식·민물어패류·산채류 등 사계절 재료를 안정적으로 제공한다.

 

순천만의 짱뚱어·장어 등 갯벌에서 나오는 식재료, 여수·여천의 다양한 생선류, 광양만의 해조류, 벌교 꼬막, 선암사와 송광사를 품은 조계산 등지의 산나물, 순천평야의 곡식과 채소 등은 한정식의 기본 골격을 풍성하게 지탱하는 핵심 식재들이다. 이러한 지리적 혜택은 한정식이 ‘과하게 꾸미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완성미가 드러나는 상차림’으로 발전한 원천이다.

 

순천 음식문화의 깊이를 더하는 또 하나의 근간은 장류다. 소금산지인 신안군, 영광군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적 위치는 전라선 음식문화를 발전시켰다. 그 중심에는 된장·간장·고추장 등 장류 문화가 발전되면서 나물무침의 감칠맛, 찌개의 육향, 조림의 균형감이 한정식의 기본 맛을 형성했다. 발효의 역사와 기술은 순천 한정식의 수준을 결정짓는 핵심 자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도시화 속에서도 생활음식의 기반이 끊어지지 않은 점은 순천 한정식의 고유한 힘이다. 웃장·중앙시장·아랫장을 비롯한 전통시장에는 지금도 제피·배초향 같은 향신채, 고유 산채류, 대멸치, 서대어 등 각종 어물 등 토착 식재가 꾸준히 유통된다. 이는 일상적 가정식 밥상과 반가 상차림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만들었고, 순천 한정식이 관광객을 위한 ‘전시 음식’이 아니라 지역 생활문화로 성숙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이러한 조건이 축적되면서 과거 장천동을 중심으로 30~40첩을 기본으로 내놓는 한옥형 한정식 전문점들이 반세기 넘게 순천식 상차림을 지켜 왔다. 전남 동부권 중심 도시로서 공적인 접대 수요가 많았던 점, 그리고 지역 식재를 풍성하게 활용할 수 있었던 점이 자연스럽게 정갈하면서도 넉넉한 상차림을 발전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광양제철·여수국가산단의 성장으로 순천이 거주 중심 도시가 되자, 장천동과 옥천동을 중심으로 발전하던 한정식 전문점들은 도심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순천 한정식은 남도의 넉넉함 속에서 ‘정원처럼 구성된 상차림’이라는 독창적 미학을 확립하게 되었다.

 

실제로 순천 한정식의 반상을 들여다보면 정원을 산책하는 듯한 감각적 체험이 펼쳐진다. 잘 가꾼 정원에서 큰 나무·작은 나무·꽃·연못이 조화를 이루듯, 상차림에서도 크기와 높이, 색채가 다른 그릇들이 산·들·바다의 식재와 함께 조화롭게 배치된다. 정원이 유사 생태를 가진 식물의 군락이라면, 순천 한정식은 서로 다른 환경의 식재들이 한 상 위에서 새로운 생태적 조화를 이루는 ‘식재의 정원 예술’이다.

 

이 점은 순천 한정식이 순천만국가정원과 깊은 문화적 연관성을 공유한다. 순천만국가정원이 자연을 시각과 공간의 예술로 구현했다면, 순천의 한정식은 자연을 맛과 구성의 예술로 재해석한다. 정원을 거닐며 사계를 감각하는 경험과 식당에서 상차림을 마주하는 경험이 서로 호응하며 순천의 자연성과 미감을 함께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순천 한정식은 지역의 역사·지리·생활문화·생태·발효전통이 결합해 탄생한 정원형 미학의 결정체이다. 정원을 걷듯 상차림을 바라보고, 자연의 생태를 맛으로 체감하는 경험—바로 이것이 순천 한정식이 남도 음식의 품격을 대표하는 이유이며, 순천만국가정원과 함께 순천을 ‘미각의 정원 도시’로 만드는 힘이다.

 

참고문헌

허북구. 2005. 전라도 호남선 음식의 적자, 나주밥상. 세오와 이재.

허북구. 2025. 500년 왕골돗자리의 솜씨가 스민 함평 육회비빔밥.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2-06).

허북구. 2025. 대한민국 격동기 기록사진가 이경모와 광양 재첩요리.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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