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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고려인마을, 연해주 고려인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본격 추진 모스크바 고려신문과 협력… 관련 자료 한·러 병기 공개 2025-12-14
김승룡 jnnews.co.kr@hanmail.net

[전남인터넷신문]‘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고려신문(대표 이철수)과 협력해, 국내 입국 후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는 고려인동포 가운데 독립유공자 후손을 발굴·지원하는 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광주 고려인마을은 고려신문이 국내외 사료를 수집·정리한 후 한글본과 러시아어 번역본으로 제작한 「연해주 고려인 독립유공자 후손을 찾아서」 관련 자료를 고려인마을 홈페이지 공지사항에 게시하고, 이를 토대로 후손 찾기에 나섰다.

고려신문이 현재까지 발굴한 고려인 독립운동가는 총 21명으로, 이들은 러시아 연해주와 만주벌판을 중심으로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한 인물들이다. 다수는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으로 이동해 독립군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들은 1921년 1월 허근(許根)이 이끄는 의군부 부대 대원으로 편성돼 러시아 이만을 거쳐 같은 해 3월 원동(연해주)공화국 마자노바 지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8일,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이끄는 고려혁명군과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9연대가 수라세프카에 주둔 중이던 사할린특립의용대를 공격하면서 이른바 ‘자유시참변’이 발생했다.

당시 의군부 대원들과 함께 사할린특립의용대 측에 주둔하고 있던 독립군 강영렬은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이끄는 고려혁명군과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9연대의 공격이 시작되자, 동족 간 무력 충돌을 끝내 거부하며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나는 차마 붉은 군인이나 내 동족을 죽일 수 없다. 그들에게 죽여 달라 애원하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말한 뒤, 결국 자신의 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이러한 선택에 담긴 희생과 공적을 인정해 2021년 강영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자유시참변 이후에도 독립군 재편 노력은 이어졌다. 1921년 3월 이후 서간도 군비단은 길림성 장백현을 떠나 이만에 집결했고, 연해주에 모인 상해파 인사들과 연합해 독립군 양성 체계를 구축했다. 같은 해 9월 이만에서 고려의용군사의회를 조직하고 사관학교를 설립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대한의용군이 창설됐다.

그러나 1921년 말,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 백군이 하바롭스크를 향해 공세를 개시하면서 이만전투가 벌어졌다. 1921년 12월 4일, 이만 방어를 위해 투입된 대한의용군 제2중대는 격렬한 전투 끝에 3명을 제외한 전원이 전사했다. 이 과정에서 제2중대 군정위원이자 통역을 맡았던 강표도르도 순국했으며,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2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광주 고려인마을은 이와 같은 내용이 담긴 이번 자료 공개를 계기로, 이미 확인된 독립운동가 21인뿐 아니라 연해주·만주 지역에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했음에도 아직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을 추가 발굴하고, 역사적 정당한 예우로 연결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독립유공자 후손을 체계적으로 확인·연결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해 국내 입국 후 체류와 생계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려인동포 지원을 더욱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는 “이번 사업은 단순한 자료 공개를 넘어, 국가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의 역사를 공동체 차원에서 다시 세우는 과정”이라며 “앞으로도 고려신문과 협력을 통해 독립유공자 후손 발굴과 지원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자료 정리 작업은 자료 편집 모스크바 고려신문 이철수, 번역 류미정, 감수 송잔나 등의 노력으로 진행되고 있다.

고려방송: 양나탈리아 (고려인마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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