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소리꾼의 목소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십 년의 세월이 쌓이고, 피와 땀이 스며든 시간 위에서야 한 소절의 참된 소리가 완성된다. 판소리 명창들이 “목이 터져야 소리가 열린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깊이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내의 시간과 삶의 장단으로 빚어지기 때문이다.
그 장단의 결은 오래 끓여낸 나주 곰탕의 국물과 닮아 있다. 느림의 미학, 진득한 기다림, 그리고 담백한 울림이 그 둘의 공통된 숨결로 흐른다. 판소리의 명창은 하루도 목을 쉬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훈련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매일의 연습 속에 인내의 시간과 감정의 숙성이 함께 존재한다.
거친 바람과 먼지 속에서도 한 줄의 가락을 바로 세우기 위해 버티는 과정, 그것이 예술가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는 길이다. 나주 곰탕도 그렇다. 센 불에서 급히 끓이면 국물은 탁해지고 잡내가 난다. 낮은 불에서 오래 끓이며 떠오르는 거품을 걷어낼 때 맑고 깊은 맛이 생긴다.
한순간의 열정보다는 오랜 인내가 본질을 만든다는 점에서 곰탕의 국물과 소리꾼의 목소리는 같은 리듬을 타고 있다. 명창의 목소리가 깊어질수록 세월이 깃든다. 젊을 때의 고운 목소리는 사라지고, 쉰 듯하면서도 단단한 울림이 남는다. 이는 오래 고아낸 곰탕 국물의 진하고 맑은 뒷맛과 닮았다. 인내의 시간은 탁함을 걷어내는 여정이다.
소리꾼의 인생은 장단의 흐름과 같다. 진양조처럼 느리고 장중하게 시작해 중모리의 평온한 흐름을 거쳐 자진모리로 고조되었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빠를 때가 있으면 느릴 때가 있고, 강한 소리 뒤엔 여백이 필요하다. 곰탕도 불을 세게 했다가 낮추며, 은근하게 끓이는 리듬 속에서 맛이 깊어진다.
불의 강약 조절은 장단의 완급과 다르지 않다. 타이밍을 읽는 감각, 그것이야말로 장단과 불맛의 예술이다. 힘을 주었다가 빼는 순간 소리는 살아나고, 곰탕 역시 불을 줄이고 기다리는 틈에서 재료의 본맛이 스며든다. 두 세계 모두 절제와 기다림 속에서 완성된다.
판소리 한 소절에는 희로애락과 한이 뒤섞인다. 소리꾼은 그 감정을 몸으로 받아내며 청중에게 전한다. 그 울림이 진실할수록 관객의 마음이 젖는다. 나주 곰탕을 한 숟가락 뜰 때의 감각도 같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 속이 풀리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단지 맛이 아니라 몸과 감정이 동시에 해방되는 순간이다.
국물이 끓는 소리, 고기를 써는 소리, 뚝배기에 담기는 소리는l 조용한 악기 연주처럼 들린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는 마치 북채가 북면을 치는 듯 생명감 있는 리듬을 만든다. 조리의 과정 자체가 연주이며, 그 결과물이 국물의 울림으로 남는다.
소리꾼은 언제나 기다린다. 목이 다 나가도 다시 소리를 내기까지 기다리고, 공연의 순간을 기다린다. 그 기다림 속에서 세상을 배우고 사람의 마음을 익힌다. 나주 곰탕 또한 기다림의 예술이다. 푹 삶은 뼈에서 나오는 향은 서두름이 아닌 천천히 침전된 시간의 향이다.
불의 세기를 낮추고 거품을 걷어내며 온도를 지켜보는 그 긴 인내 속에서 맛은 숙성된다. 인내가 곧 풍미다. 판소리의 장단이 시간의 미학이라면, 나주 곰탕의 맛은 열과 기다림의 미학이다. 세상은 속도를 경쟁하지만, 진짜 소리와 맛은 느리게 익는다.
소리꾼의 인내와 나주 곰탕의 풍미는 같은 철학의 다른 표현이다. “참을 줄 아는 사람만이 깊은 소리를 내고 깊은 맛을 낸다.” 한 그릇의 곰탕은 시간을 먹는 일이며 인내를 삼키는 일이다. 한 소리꾼이 평생의 호흡으로 만들어낸 목소리처럼 곰탕의 국물에는 오랜 불과 정성이 응축되어 있다.
둘 다 느림 속에서 피어나고 여백 속에서 완성된다. 인내의 시간은 소리를 맑게 하고, 기다림의 불은 국물을 깊게 한다. 그렇게 삶은 장단을 타며 흘러가고, 그 장단 속에서 사람은 자신만의 맛과 소리를 완성한다. 나주 곰탕의 풍미는 결국 삶의 장단이 들려주는 국물의 소리다. 그 한 모금 속에 소리꾼의 인내와 인간의 온기가 함께 녹아 있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5. 나주 곰탕의 풍미와 수묵화의 여운.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14).
허북구. 2025. 나주 곰탕, 영화 시네마 천국을 닮은 맛.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13).
허북구. 2025. 나주 곰탕의 풍미와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