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전라도의 음식 지형은 동서와 전라선 및 호남선 음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호남선 권역인 서부 평야지대는 소금, 젓갈, 해산물 및 육고기 음식문화가 발달했고, 전라선권인 동부 산악지대는 장류와 산채가 많이 사용된 음식이 중심을 이룬다.
전라선 권역이라 불리는 구례, 남원, 순창 일대의 음식은 산과 강이 빚어낸 절제의 미학을 품고 있다. 이 지역의 대표 음식인 구례 산나물정식은 동편제의 고향이라 할 만한 ‘지리산의 소리’를 닮았다. 남원의 추어탕이 강건한 울림이라면, 구례의 산나물은 여백이 있는 울림이다.
지리산의 품에서 자란 취나물, 고사리, 도라지, 두릅나물 등은 산의 기운을 머금는다. 간은 세지 않지만 향이 깊고, 짠맛보다 향으로 여운을 남긴다. 이것은 동편제 소리의 결과 닮았다. 동편제는 과장되지 않은 음색으로도 감정을 깊이 전달한다. 소리꾼이 노래와 노래 사이의 숨결 속에서 울림을 빚듯, 구례의 산나물정식도 나물과 나물 사이의 여백이 맛의 질서를 만든다.
이 여백의 미는 단순한 절제가 아니다. 산나물정식은 불의 강렬한 조리보다는 손끝의 섬세한 감각으로 완성된다. 삶고, 헹구고, 다듬고, 무치는 과정은 소리꾼이 목을 다듬는 일과 같다. 어느 하나라도 지나치면 전체의 조화가 깨진다. 나물 하나하나의 향이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도록, 간의 깊이를 조절하는 솜씨가 밥상의 품격을 결정한다. 마치 동편제 소리의 진양조가 긴 호흡 속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이유와 같다.
지리산 자락의 음식은 소리처럼 단단하고 절제되어 있다. 서해안의 음식이 바다의 염도처럼 짠맛으로 기억된다면, 구례의 밥상은 흙과 나무의 향으로 마음을 달랜다. 동편제의 고향 남원과 구례는 산악지대라는 공통된 환경을 지니고, 이 자연적 조건이 음식에도, 예술에도 스며 있다. 산은 계절의 변화를 천천히 품으며, 사람에게 기다림의 미학을 가르친다. 그 느림과 절제가 바로 동편제의 미학이자 구례 음식의 정수이다.
전라선권의 음식 문화는 순창 고추장, 순창장류박물관 그리고 지리산 나물이 상징하듯 장류와 산채의 발달로 요약된다. 서부의 염장 문화가 젓갈과 해산물에 기반을 두었다면, 동부의 장류와 산나물 문화는 산의 자원과 저장 기술에서 비롯되었다. 고추장과 된장은 짠맛보다 감칠맛을 내며, 나물과 어우러져 은은한 맛의 층위를 만든다. 이런 조화는 마치 동편제 소리의 중음역대가 주는 안정감과 같다. 높고 낮은 음의 대비가 아닌, 중심의 울림으로 감동을 전하는 구조다.
동편제의 소리와 구례의 산나물정식은 ‘자연을 해석하는 인간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거친 산의 숨결을 억누르지 않고, 그 흐름을 따라가며 조율하는 일. 그 절제의 미학이야말로 남도의 예술이자, 구례의 밥상이 전하는 조용한 감동이다.
산나물정식의 상차림은 수묵화와도 같다. 흰 그릇 위에 초록빛 나물이 단정히 놓인다.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그 안에 산의 기운이 담겨 있다. 보는 순간 마음이 고요해지고, 한입 베어 물면 향이 천천히 퍼진다. 나물의 향은 소리의 잔향처럼 오래 남아, 먹는 이를 사색으로 이끈다.
구례의 산나물정식은 동편제의 정신을 밥상 위에 옮겨 놓은 예술이다. 절제 속의 깊이, 단순함 속의 질서, 여백 속의 풍요. 그 한 점의 나물에서 한 소절의 소리가 피어난다. 산이 만든 나물, 사람이 빚은 맛,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조용한 울림. 그것이 바로 동편제로 읽은 구례의 밥상이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5. 전라도 호남선 음식의 적자, 나주 밥상. 세오와 이재.
허북구. 2025. 보성군 복내면 다슬기 수제비와 마음의 치유.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18).
허북구. 2025. 나주 곰탕의 풍미와 수묵화의 여운.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14).
허북구. 2025. 나주 곰탕, 영화 시네마 천국을 닮은 맛.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