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보성 벌교 앞바다의 갯펄은 남도의 정서가 태어나고, 예술과 음식이 함께 자라난 생명의 터전이다. 밀물과 썰물이 수없이 오가며 남긴 흔적 속에서 사람은 리듬을 배웠고, 그 리듬은 판소리의 장단이 되고, 작곡가 채동선의 선율이 되었으며, 꼬막요리의 맛으로 이어졌다.
벌교의 갯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색을 바꾼다. 아침에는 은빛 물결이 번지고, 해질 무렵이면 붉은 노을이 갯벌 위에 물결처럼 번지며 바다와 하늘을 잇는다. 바람이 불면 뻘 위의 물결이 반짝이고, 새떼가 날아오르면 그 울음소리가 자연의 선율을 만든다.
이 느리고 깊은 리듬이 바로 남도의 예술을 잉태했다. 갯펄은 소리를 낳고, 소리는 감정을 낳았으며, 그 감정은 예술로 피어났다. 이곳에서 태어난 채동선(蔡東鮮, 1901–1953)은 그 자연의 정서를 음악으로 옮긴 인물이다.
그는 보성군 벌교읍 벌교2리 세망마을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학을 거쳐 독일 베를린 슈테른 음악학교에서 수학했다. 대표작으로 가곡 〈고향〉, 〈향수〉, 〈망향〉, 〈모란이 피기까지〉, 〈바다〉 등이 있으며, 그중 〈고향〉은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으로 고국의 바람과 갯펄의 숨결을 담고 있다.
그의 음악에는 남도의 리듬, 즉 갯펄의 호흡이 스며 있다. 부드럽고 여운이 긴 선율은 서편제의 가락처럼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감정의 깊이를 간직한다. 채동선의 음악은 곧 벌교의 바다와 땅이 길러낸 예술적 감수성의 결정체였다.
보성은 전통적으로 서편제 판소리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으며, 수많은 소리꾼들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며 서편제의 정통을 이어왔다. 벌교 역시 이러한 서편제 문화권에 속한 고장으로, 남도 소리의 정서와 감각이 자연의 곡선을 닮아있다.
동편제가 강한 직선의 기세라면, 서편제는 완만한 선율과 여운의 미학이다. 갯펄의 호흡이 느린 만큼 소리의 장단도 느리다. 그러나 그 느림 속에는 삶의 격정과 한이 함께 흐른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듯 감정의 고조와 이완이 반복되는 그 리듬이 바로 남도 소리의 정서다. 서편제는 인간의 소리가 아니라, 갯펄이 만들어낸 음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벌교 꼬막식당가 옆에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기념한 태백산맥문학관이 자리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채동선의 생가가 여전히 남아 있다.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바로 이 벌교와 보성 일대를 중심 배경으로 하며, 지역의 자연과 인간, 시대의 아픔을 거대한 서사로 엮어냈다.
그의 문장은 갯펄의 질감처럼 질기고 강하며, 인물들은 바다의 생명처럼 끈질기다. 문학은 이곳의 흙과 바람에서 태어난 인간의 이야기였다. 벌교는 또한 영화 〈서편제〉의 주요 촬영지 중 하나로, 채동선의 서정적인 서양음악과 판소리의 정서가 함께 어우러지는 남도의 예향(藝鄕)이다.
음악이 태어나고 문학이 머문 이곳의 예술적 정서는 음식의 맛으로 완성된다. 벌교 앞바다는 음악과 문학뿐 아니라, ‘맛’이라는 또 다른 예술을 길러냈다. 벌교는 겨울철 별미인 꼬막의 주산지로, 앞바다 여자만(汝子灣)은 오염되지 않은 청정 갯펄로 유명하다. 풍부한 영양분과 찰진 뻘로 이루어진 이 바다는 꼬막 서식의 최적 조건을 갖추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꼬막이 전라도 지역특산물로 기록되어 있으며, 벌교 꼬막은 2009년 ‘지리적 표시 수산물 제1호’, 2015년 ‘국가중요어업유산 제2호(보성 뻘배어업)’으로 지정되며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벌교읍의 ‘꼬막식당 거리’에 들어서면 다양한 꼬막 요리가 손님을 맞는다. 꼬막무침, 꼬막비빔밥, 꼬막탕, 꼬막전 등 한 상 가득 펼쳐진 남도의 풍미는 예술에 가깝다.
꼬막을 삶아 껍질을 까고, 양념에 무치고, 밥 위에 올리는 과정은 모두 기다림의 예술이며, 그 느림의 장단은 서편제의 리듬과도 닮아 있다. 꼬막무침의 매운맛은 판소리의 고조된 장단을, 꼬막비빔밥의 단맛은 채동선의 가곡 같은 서정을 닮았다. 한 숟가락의 꼬막 속에는 갯펄의 시간, 사람의 인내, 그리고 남도의 감정이 함께 익어 있다.
보성 벌교 앞바다의 갯펄은 자연과 예술, 그리고 음식이 함께 숨 쉬는 생명의 무대다. 바다는 음악을 낳았고, 갯펄은 문학을 품었으며, 꼬막은 그 모든 것을 맛으로 완성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저녁의 갯펄 위에서 들리는 서편제의 여운, 조정래의 문장 속 인물들의 숨결, 채동선의 선율, 그리고 꼬막의 짠맛과 단맛은 모두 같은 언어로 이어진다. 그것은 바로 벌교라는 땅이 길러낸 ‘느림의 미학’이자, 남도의 혼이다.
벌교에서 꼬막요리를 마주하는 일은 단순히 음식의 맛을 즐기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벌교 앞바다의 갯펄이 만들어 낸 예술의 시간을 음미하는 일이며, 자연과 인간, 예술이 함께 호흡하는 남도의 정신을 만나는 순간이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5. 영광군 용왕제와 선유놀이, 그리고 법성포 굴비정식.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23).
허북구. 2025. 문학과 영화의 풍경에서 만난 장흥 회진면의 열무된장물회.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