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천경자(千鏡子, 1924~2015)는 ‘색의 시인’으로 불린다. 그녀는 1924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나 남해의 빛과 바람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일부 문헌에는 전남 곡성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고흥군에서는 천 작가가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는 고흥읍 옥상마을 일대(과거 옥하리·서문리 인접)를 ‘천경자 예술길’ 명예도로명으로 지정했다.
그런데 그녀의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1988)에는 “나는 남해의 빛 속에서 자랐다. 바다와 붉은 노을의 마을, 그것이 나의 고향이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 문장은 남해를 마주한 고흥 도양읍 녹동 일대의 풍경과 정확히 맞물린다. 녹동항은 천경자 화백이 자라며 ‘빛과 색’을 체득한, 예술적 원향의 상징과도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천경자의 그림은 언제나 뜨겁고 강렬하다. 당시 먹 중심의 동양화단에서 그녀는 붉은색과 노란색 같은 원색을 대담하게 사용했다. 그 색들은 단순한 시각적 장식이 아니라, 인생의 고통과 정열, 희망을 동시에 담은 감정의 언어였다. 〈정(靜)〉 속 붉은 옷의 소녀와 해바라기 배경의 노란색, 〈꽃과 병사와 포성〉 속 붉은 연기, 〈여인〉 속 노란 옷과 푸른 새의 대비는 그녀의 삶을 불태운 색의 서사였다. 붉음은 열정이자 상처였고, 노랑은 고독 속의 태양이었다.
고흥의 대지는 바로 그 색을 닮았다. 이곳은 국내 최대의 석류와 유자 산지로, 남해의 햇살과 해풍이 만들어낸 천연의 색채가 사계절을 물들인다. 붉은 석류와 노란 유자가 자라는 땅, 그곳이 천경자의 색의 원천이다. 고흥 석류는 남해의 바람과 햇살을 머금어 알이 굵고 당도가 높다.
그 속살은 터질 듯한 붉음으로, 그녀의 그림 속 여인처럼 생명과 고통의 경계에서 빛난다. 반면 고흥 유자는 향긋한 산미와 껍질에서 풍기는 청량한 향은 남해의 바람을 닮았고, 그 노란빛은 천경자 화폭의 노란 옷처럼 따뜻하면서도 고요하다. 붉은 석류와 노란 유자, 이 두 색의 대비는 천경자의 팔레트이자 고흥의 자연색이다.
천경자는 뱀 그림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녀에게 뱀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생명력과 여성적 재생의 상징이었다. “나는 뱀을 무섭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의 시작이고, 다시 태어남의 상징이다.” 그녀의 뱀은 욕망과 고통,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품은 존재였다. 그리고 남해의 바다에서 뱀처럼 미끈하고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장어일 것이다.
고흥 도양읍의 ‘녹동장어거리’는 붕장어와 갯장어 요리로 유명하다. 이곳은 천경자 화백이 회상한 “바다와 붉은 노을의 마을” 그 자체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남해의 붉은 해가 수평선 아래로 내려앉을 때, 바다 위에 번지는 보라빛과 붉은빛의 교차는 그녀의 색감과도 닮아있다. 녹동항의 장어요리는 이 남해의 빛처럼 깊고 진하다.
고흥 녹동항의 붕장어탕은 다른 지역의 장어탕과 다르다. 이곳은 된장을 풀어 국물을 낸 것으로 진하면서도 텁텁하지 않은 구수한 된장 맛이 붕장어의 감칠맛과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다. 이 국물에 고춧가루를 더하면 얼큰한 남도의 맛이 살아나고, 마지막에 제피가루나 후춧가루를 약간 더하면 국물의 깊은 맛이 한층 진해진다. 그 맛은 단순한 보양식이 아니라, 녹동 앞바다의 빛과 바람이 녹아든 향토의 기억이다.
녹동의 장어거리에서 요리에 사용하는 것은 주로 붕장어(아나고)와 갯장어(하모)다. 갯장어는 여름철 샤부샤부로 즐기며, 백 번의 칼질 끝에 살이 피어나듯 부드럽다. 붕장어는 사계절 내내 탕·구이·회로 다양하게 쓰인다. 비늘이 없고 살이 부드러워 먹기 좋고, 지방이 풍부해 겨울철에는 더욱 고소하다. 붕장어에는 비타민 A와 칼슘, 단백질이 풍부하여 남해 사람들은 “장어 한 그릇에 하루의 기운이 돌아온다”라고 말한다.
붕장어탕 한 그릇의 색은 고흥의 대지를 닮았다. 된장의 갈색, 고춧가루의 붉음, 장어살의 유백색이 어우러져 천경자의 팔레트처럼 깊고 생명력 있다. 그녀가 말한 “피처럼 붉지만, 눈처럼 차가운 색”은 바로 이 남해의 풍경과 음식에서 되살아난다. 천경자의 색채는 결국 고흥의 자연과 이어져 있다. 붉은 석류의 열정과 노란 유자의 향, 그리고 녹동 장어탕의 진한 국물은 모두 남해의 빛을 품은 색이다. 그 색은 곧 천경자의 예술이 지닌 생명력과 맞닿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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