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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의 인상주의와 술향의 인상을 품은 화순 기정떡 - 농업 칼럼니스트 농학박사 허북구
  • 기사등록 2025-10-28 08: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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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한국 인상주의의 거장 오지호(吳之湖, 1905~1982)는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구 인상주의의 기법을 받아들이되, 남도의 햇살과 들판, 그리고 사람의 온기를 한국적 정서로 그려낸 화가였다. 그래서 미술사에서는 그를 “한국적 인상주의 화풍의 선구자”라 부른다.

 

인상주의(Impressionism)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탄생한 예술 혁명이다. 사물의 본질보다 눈에 비친 순간의 빛과 색을 포착하는 사조로, 모네·르누아르·세잔 등이 그 대표다. 오지호 또한 ‘빛의 언어’로 자연을 이야기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 시절 그는 외광파(外光派) 풍의 인상주의를 학습했고, 이를 한국의 풍토와 정서에 맞게 변용하여 ‘한국 인상주의’라는 독자적 미학을 세웠다.

 

그의 대표작 〈남향집〉(1939)을 보면, 겨울 햇살 아래 큰 나무의 그림자가 벽과 지붕에 길게 드리워져 있다. 차가운 겨울의 공기 속에서도 노랑과 붉은 톤이 교차하며 따스한 기운이 감돈다. 한국의 전통가옥과 삶의 풍경을 서양의 화법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한국적 인상주의의 출발점이라 할 만하다.

 

화순 동복면 독상리의 오지호 생가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는 그의 작품세계를 기리는 오지호기념관이 있다. 정면이 넓은 창으로 설계된 건물 안에는 ‘빛의 화가’가 남긴 색채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이 기념관에서 차로 10여 분 떨어진 사평면에는 또 하나의 ‘인상주의 예술’이 있다. 바로 화순 기정떡이다.

 

기정떡은 여름철에 즐겨 먹는 ‘증편(蒸片)’의 전남 방언으로, 술떡·기주떡·벙거지떡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기정’이란 이름은 막걸리로 반죽을 발효시키는 ‘기주’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그 원형은 중국의 상화병(霜花餠)이라 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밀 대신 쌀을 사용하며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음식디미방』과 『규합총서』에도 그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을 만큼 역사가 깊은 떡이다.

 

기정떡은 우리나라 떡 가운데 유일하게 발효과정을 거치는 떡이다. 쌀가루에 막걸리를 넣고 반죽을 발효시킨 뒤 쪄서 만들며, 사평 기정떡 역시 이 전통 방식을 따른다. 발효가 진행되면서 막걸리 향이 배어들고, 이산화탄소가 반죽을 부풀게 해 부드럽고 은은한 단맛이 완성된다. 무엇보다 여름철에도 쉽게 상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그 비밀은 발효에 있다. 효모가 당분을 분해하며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만들어내고, 젖산균이 젖산과 초산을 생성해 반죽의 pH를 약 4~5로 낮춘다. 이 산성 환경은 부패세균과 곰팡이의 증식을 억제해 발효 자체가 천연의 방부 효과를 낸다. 효모가 만들어내는 소량의 알코올 또한 항균 작용을 하여, 떡이 쉽게 시지 않고 은은한 술향이 남는다. 막걸리 향과 유기산의 조화가 사평 기정떡 특유의 향미를 완성하는 것이다.

 

쌀가루는 밀가루와 달리 글루텐이 없어 일반적으로 다공성 조직을 만들기 어렵다. 그러나 막걸리에 포함된 효모와 젖산균의 복합 발효 덕분에 기정떡은 미세한 기포 구조를 가진 다공질 조직을 이루며, 그 질감이 마치 서양의 빵처럼 부드럽다. 이러한 점에서 기정떡은 전통과 현대의 식감이 공존하는 음식이다.

 

기정떡은 서두를 수 없다. 온도와 습도, 시간을 조율하며 천천히 기다려야만 제 향과 질감이 완성된다. 이 ‘느림의 리듬’은 오지호의 인상주의와 닮아있다. 오지호가 빛이 스스로 숙성되기를 기다렸듯, 반죽 속 효모 또한 천천히 숨 쉬며 술향을 익힌다. 그의 색채가 시간의 호흡으로 깊어졌듯, 기정떡의 맛도 기다림 속에서 완성된다.

 

오지호가 화단에서 인상주의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면, 기정떡은 떡 중에서도 향과 시간의 미학을 구현한 유일한 음식이다. 인상주의가 ‘빛의 감각’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면, 기정떡은 ‘향의 감각’을 발효로 빚어낸 예술이다. 오지호의 화폭이 남도의 빛을 담았다면, 화순 기정떡은 남도의 공기와 술향을 품었다. 둘 다 자연의 순리와 기다림으로 완성된 예술이다.

 

화순 능주의 기정떡은 단맛이 깊고, 사평의 기정떡은 술향이 은근하다. 마치 오지호의 〈남향집〉과 〈무등산〉(1969)이 계절마다 다른 빛을 머금듯, 두 마을의 기정떡도 각기 다른 기후와 손맛이 빚은 색을 지닌다. 그러나 그 속을 흐르는 맥은 하나다. 자연의 속도에 자신을 맡긴 기다림의 미학이다.

 

오지호의 화폭에서 빛은 살아 숨 쉬고, 사평의 시루에서는 술향이 피어난다. 하나는 눈으로 느끼는 인상주의, 다른 하나는 맛과 향으로 체험하는 인상주의다. 빛으로 그린 그림, 술향으로 빚은 떡. 이 둘은 남도의 감각이 낳은 예술의 두 얼굴이며, 화순에서 만날 수가 있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5. 영랑의 고향에서 피어난 모란, 모란을 닮은 강진 한정식.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27).

허북구. 2025. 갯펄이 키운 보성 벌교의 예술, 채동선의 음악과 꼬막요리.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24).

김진성, 최진희, 최해연. 2022. 막걸리 첨가량을 달리한 증편의 품질 특성. 한국식품과학회지 54(2):196-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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