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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미학 임권택 영화와 장성 사찰 음식 - 농업 칼럼니스트 농학박사 허북구
  • 기사등록 2025-11-01 0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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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전라남도 장성군을 이야기할 때, 백양사 인근의 사찰음식을 빼놓을 수 없다. 백암산 자락에 터를 잡은 백양사는 천년 동안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음식 철학을 지켜왔다. 이곳의 사찰음식은 절제와 무욕, 자연의 순환을 그대로 따르며 ‘비움으로 채움’이라는 수행적 가치를 담고 있다. 사찰음식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미학이자 삶의 태도다.

 

장성은 이러한 사찰적 감수성을 음식뿐 아니라 예술의 영역에서도 품고 있다. 특히 장성 출신의 의 영화에 잘 나타나 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세계는 남도의 감정과 시간, 한국인의 삶을 깊이 응축해 왔고, 특히 “여백·침묵·순환”을 미학적 핵심으로 삼는다. 이 철학은 사찰음식의 정신성과 정확히 이어진다. 즉, 장성은 ‘먹는 수행’과 ‘보는 수행’이 공존하는 고장이다.

 

임권택의 대표작 〈서편제〉가 남도의 소리와 한(恨)을 다룬 영화라면, 그의 또 다른 주요 작품들 가운데는 사찰음식과 직접적 연결점을 지닌 불교적 영화들이 있다. 〈만다라〉(1981),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그리고 유실되었다가 30년 만에 복원된 〈비구니〉(1984)다.

 

〈만다라〉는 두 승려가 수행과 번뇌, 출가와 세속의 경계를 오가며 스스로를 발견해 가는 여정의 영화다. 산중 암자, 걸식, 침묵의 수행 등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욕망을 덜어내는 삶’을 시각화한 장치다. 이는 사찰음식의 조리 원리, 즉 “양념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걷어내는 조리”와 맞닿아 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제목부터 불교 수행 진언을 그대로 사용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阿提阿提 波羅阿提 波羅僧阿提 摩訶娑婆訶)” 이 문장은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완전히 건너가 깨달음을 이루자”라는 뜻이다. 여기서 ‘저 언덕’은 피안(彼岸), 즉 해탈·열반의 세계를 가리키며, ‘이쪽 언덕’은 차안(此岸), 즉 번뇌와 집착이 머무는 세속 세계를 의미한다.

 

이 진언은 차안(此岸)의 욕망을 떠나 피안(彼岸)의 자유로 건너가는 수행의 여정을 압축한 문장이다. 사찰음식 또한 같은 철학을 맛으로 실천한다. 먹는 것이 배부름이 아니라, 비움의 길이 되는 식사, 이것이 수행적 음식이다.

 

〈비구니〉는 더욱 상징적이다. 제작 중단으로 사라졌다가, 2014년 태흥영화사 창고에서 발견된 필름이 복원되며 39분의 무성(無聲) 영상으로 공개된 작품이다. 대사가 없고 소리가 없지만, 배우의 표정과 몸짓만으로 감정이 전달된다. 이것은 사찰음식이 추구하는 무조미(無調味)의 철학, “군더더기 없는 완성”과 닮아 있다. 맛이 소리 없이 스며들듯, 이 영화는 침묵으로 울림을 남긴다.

 

세 영화의 공통점은 “욕망을 덜어내는 방식으로 인간을 이해한다”라는 데 있다. 사찰음식 역시 “맛을 채우는 요리”가 아니라 “욕망을 다스리는 조리”이며, 먹는 행위가 곧 수행이 되는 자리이다.  

 

장성 백양사 인근의 사찰음식은 철저히 계절을 따른다. 봄에는 두릅과 취나물, 여름에는 애호박, 가을에는 버섯과 들깨, 겨울에는 무와 두부 등 자연의 순환을 식탁에 옮긴 것들이 많다. 임권택 감독의 카메라도 계절, 바람, 빛을 활용해 감정의 리듬을 만든다. 음식이 자연을 받아들이듯, 그의 영화도 삶의 흐름을 받아들인다.

 

사찰음식은 흔히 ‘절에서 먹는 음식’으로만 이해되지만, 그 본질은 채식 기반의 생명존중 음식문화다. 동물성 식재료뿐 아니라 오신채까지 배제하고, 가능한 한 지역 식재료를 사용하며, 조리 또한 가공과 자극을 최소화한다. 오늘의 언어로 말하자면, 사찰음식은 동양의 전통 비건(vegan) 음식이며, 가장 오래된 친환경 로컬푸드 시스템이다.

 

서양에서 비건이 윤리·환경을 기반으로 새롭게 등장했다면, 동양의 사찰음식은 이미 수행·자연·순환·몸의 균형을 실천해 온 문화였다. 백양사 인근에서 나물정식이나 들깨탕 한 그릇을 먹는 행위, 임권택 영화 속 침묵을 바라보는 행위는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비우되 채우는 삶의 방식. 먹는 것이 수행이 되고, 예술이 공양(供養)이 되는 곳. 그 조용한 충만의 미학을 품은 땅이 바로 장성이다. 그러한 장성을 가면 북하면 문화예술공원에서 임권택시네마테크를 만날 수 있고, 북하면 단풍로에서는 사찰음식을 맛볼 수가 있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5. 공옥진의 삶과 춤 그리고 영광 모시떡.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31).

허북구. 2025. 해남윤씨 녹우당과 고택 그리고 해남 닭요리.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30).

허북구. 2025. 대한민국 격동기 기록사진가 이경모와 광양 재첩요리.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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