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한국인의 식생활에서 고추는 빠질 수 없는 대표 채소다. 고추가 맵게 느껴지는 이유는 ‘캡사이신’이라는 성분이 혀의 통각 수용체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매운맛의 정도는 ‘스코빌지수(SHU)’로 측정되는데,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인 페퍼 X는 3,180,000 SHU, 한국의 청양고추는 4,000~12,000 SHU 수준이다. 이 수치만 비교해도 “고추는 다 같은 고추가 아니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우리 음식 가운데 고추의 매운 성분이 핵심이 되고, 이름 자체에 ‘매운맛’을 품고 있는 대표 음식이 바로 매운탕이다.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음식이지만, 섬진강이 흐르는 전남 곡성군 오곡면 압록 일대의 매운탕 문화는 남다른 전통을 지닌다. 이 지역에는 1970년대부터 형성된 매운탕 전문 식당가를 중심으로 ‘압록 참게·은어 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며, 강가를 따라 이어지는 식당에서는 참게탕·은어매운탕이 일상처럼 자리 잡았다.
압록 백사장은 보성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은빛 모래밭과 맑은 물결이 어우러진 절경을 지녔다. 예전에는 단체 관광객들이 몰려들던 자연 관광지였고, 지금은 곡성 기차마을을 오가는 증기기관차와 압록유원지가 더해져 관광과 음식 문화가 동시에 살아 있는 공간이 되었다.
매운탕 식당가는 압록에서 출발해 죽곡면을 지나 구례 방면으로 이어지는데, 이 중 죽곡면 하한리는 19세기 말 옹기가마 한 곳, 백자 가마 세 곳이 운영되던 곳으로도 기록된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발(鉢)은 ‘사목고태형(砂目高台型)’이라 불리며, 굽에서 몸체까지 완만한 곡선을 그리다가 윗부분이 직립하는 독특한 형태를 지닌다. 즉, 압록 매운탕은 그릇부터 음식까지, 지역의 생활문화·강문화·도자기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남도 음식유산인 셈이다.
압록에서 보성강 줄기를 따라 석곡 방면으로 이동하면 아름다운 강변 풍경이 펼쳐진다. 곡성사람들은 보성강을 예로부터 크고 거칠다는 의미로 대황강이라고 했다. 이 강변 길을 따라가다 보면 ‘태안사’로 향하는 이정표가 보이고, 태안사 입구에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이 자리한다. 이곳은 민족시인 조태일(1941~1999)을 기리기 위해 2003년 세워졌으며, 그가 곡성 태안사에서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조태일은 “부조리한 체제에 굴복하지 않는다”라는 정신, 그리고 풀꽃·흙·강물 같은 자연 이미지를 통해 약자와 소외된 존재를 대변한 시인이다. 1970~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 그는 문학 활동과 저항 의식을 함께 지녔고, 『시인』 창간과 참여시 운동을 전개하다가 1980년대 예비검속으로 체포되어 약 3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때로는 거칠고 산문적이며, “세련미보다 진실과 저항”을 택한 문체로 평가되었다.
그의 시 세계는 매운탕의 맛과도 닮아 있다. 매운탕의 칼칼한 고춧가루 맛은 다른 재료의 맛을 가리기도 하지만, 바로 그 직설성과 열기 덕분에 속이 확 트인다. 조태일의 시도 그러했다. 억압에 맞서며, 고향과 국토와 민중을 노래했던 그의 언어는 ‘맵고 뜨거운 맛’으로 살아 있다. 그러나 그의 후반기 작품은 변모한다. 저항의식은 유지하되, 사회에서 자연·내면으로 시선이 확장되었다.
『풀잎은 꺾이지 않는다』,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등에서 보듯, 강과 산, 들꽃, 바람을 통해 존재와 존엄을 노래했다. 곡성의 매운탕 문화도 마찬가지다. 전통의 뿌리를 지키면서도 시대의 입맛과 여행 문화를 받아들이며 변화하고 있다. 특히 압록 일대의 참게탕과 은어요리는 곡성 음식문화의 정수다. 은어는 살에서 수박 향이 나기 때문에 구이·회·튀김 등으로 활용된다.
참게는 찜·장·수제비 등으로 이어진다. 곡성의 참게수제비는 이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으로, 통째로 찐 참게를 갈아 국물에 넣어 끓이기 때문에 칼칼하면서도 고소한 풍미가 살아 있다. 갓 떠낸 수제비는 국물의 붉은 윤기를 머금고 탱글하게 퍼지며, 참게 특유의 향은 강하지 않으면서도 깊게 배어든다. 한 숟가락 뜨면 입안에서 부서지는 게살의 감칠맛과 수제비의 쫄깃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무엇보다 ‘게살을 발라 먹는 수고 없이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남도 음식의 손맛을 보여준다.
섬진강이 만든 자연의 맛, 조태일이 남긴 저항과 연대의 정신, 그리고 곡성사람들이 지켜온 매운탕 문화는 같은 뿌리에서 뻗어 나온 이야기이다. 뜨겁고 꾸밈없고, 그러나 끝에서 은근한 단맛이 감도는 남도의 음식처럼 이 지역의 삶과 예술도 그렇게 버텨 왔다.
오늘의 압록 매운탕은 단순히 ‘옛맛을 지키는 음식’이 아니라, 곡성을 찾는 여행객이 가장 먼저 만나는 환대의 방식이다. 예전에는 강을 따라 흐르던 생활의 맛이었고, 노동의 맛이었다면, 이제는 여행의 기억과 연결되는 곡성의 음식 문화가 되었다. 한 그릇의 매운탕이 지역의 역사·풍경·사람을 함께 품고 있다는 점에서, 이곳의 국물은 여전히 뜨겁고, 여전히 살아 있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5. 소리와 국물이 빚어낸 남도 미학, 나주 신청과 나주 곰탕.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 농업칼럼(2021.11.02.).
허북구. 2025. 비움의 미학 임권택 영화와 장성 사찰 음식. 전난인터넷신문 허북구 농업칼럼(2021.11.02.).
허북구. 2021. 멧돼지 퇴치, 매운 고추로 가능할까?.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 농업칼럼(2021.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