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한국인의 식탁에서 쌀은 단순한 주식이 아니라 문화의 중심이자 정체성의 상징이다. 쌀이 자라난 논의 풍경과 물, 흙, 햇빛, 그리고 이를 일구는 사람의 손길이 모두 한 그릇의 밥 속에 스며 있다. 특히 전라남도는 오랜 세월 벼농사의 중심지로 자리해 왔다.
전남에서는 해마다 ‘전남 10대 고품질 브랜드쌀’을 선정해 식미와 품위, 안전성을 공인기관에 의뢰해 평가한다. 이러한 제도적 전통은 전남산 쌀이 지닌 높은 품질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전남의 쌀은 남쪽 해풍과 유기질이 풍부한 충적토, 그리고 깨끗한 수계(水系)가 함께 만들어내는 자연의 산물이다.
영산강 유역과 나주평야는 비옥한 충적토로 알려져 있으며, 곡성·순천·보성 지역은 내륙성 기후의 차이로 단단하고 담백한 미질을 형성한다. 토양의 실리카와 칼륨 함량, 일조량, 온도 등이 어우러지면서 쌀알의 조직이 치밀해지고, 취반 시 ‘찰지면서 퍼지지 않는’ 특유의 밥맛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맛을 두고 사람들은 “탱글탱글하다”, “찰지다”, “고슬고슬하다” 등의 표현을 쓴다.
한국어의 맛 표현에는 단순한 감각 이상의 문화적 의미가 담겨 있다. “찰지다”, “윤기가 돈다”, “달큰하다”, “구수하다”라는 말은 쌀의 품종, 수분, 온도, 그리고 정성까지 아우르는 생활 언어다. 나주·영암·함평 등 영산강 평야의 쌀은 윤기가 흐르고 찰기가 강해 부드럽게 씹히는 맛을 내며, 곡성·보성의 산간부 쌀은 고슬고슬하면서도 단맛이 은근히 배어 있다고 한다.
해남·강진·신안 등 서남해 간척지에서 재배된 쌀은 미네랄 함량이 높아 감칠맛이 도는 구수한 풍미를 지닌다는 평이 있다. 이런 지역적 평가는 과학적 수치가 아닌, 세대를 거쳐 체득된 미각의 언어다. 밥맛은 과학과 감성의 경계에 있다. 쌀의 아밀로스 함량, 수분 흡수율, 호화 특성은 밥의 물성과 식감을 결정짓는다.
일반적으로 경도가 낮고 응집성과 부착성이 높은 쌀일수록 식미 평가가 우수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전남산 쌀은 이러한 특성이 조화를 이루어 밥을 지었을 때 윤기가 흐르고, 식은 뒤에도 단맛이 오래 남는다. 대표 품종인 ‘신동진’, ‘해담쌀’, ‘새청무’ 등에서도 이런 특성이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밥맛을 좌우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물이다. 득량만, 순천만, 영산강, 섬진강 등 전남의 수계는 수질이 양호해 취반 과정에서 쌀 전분이 균형 있게 팽윤하도록 돕는다. 전남 농가의 말처럼 “물맛이 쌀맛을 살린다”라는 표현은 과학적 사실과 생활 감각이 만나는 지점이다.
밥 냄새를 일컫는 “구수하다”라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밥이 지어질 때 전분이 열과 수분을 만나 당화되며 향미가 발생한다. 이때 퍼지는 냄새 속에는 흙냄새, 볏짚냄새, 불냄새, 그리고 집안의 온기가 함께 묻어난다. 그래서 전남의 시골에서는 “밥 냄새가 나면 집이 따뜻하다”라는 말을 여전히 쓴다. 밥맛의 언어는 단순한 미각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과 감정이 담긴 문화의 언어이기도 하다.
쌀의 저장 방식 또한 밥맛의 차이를 만든다. 전남 일부 농가에서는 도정한 쌀을 항아리나 통기성이 좋은 용기에 담아 서늘하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 보관하는 전통을 이어간다. 이러한 저장법은 쌀의 산패를 늦추고 자연스러운 향을 유지한다. 덕분에 밥을 지었을 때나 식었을 때도 단맛이 오래 남는데, 이를 두고 “밥이 늙지 않는다”라고 표현하는 언어도 있다.
전남의 밥상에는 언제나 쌀이 중심이다. 굴비, 김치, 된장찌개 같은 반찬이 아무리 맛있어도 밥이 맛있지 않으면 식탁의 만족도는 떨어진다. 그래서 “이 집 밥맛이 좋다”는 말은 곧 “이 집의 마음이 따뜻하다”라는 뜻으로 통한다. 밥맛은 단순한 혀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관계와 공동체의 온도를 잇는 언어다.
전남산 쌀이 밥맛이 좋기로 널리 알려진 이유는 사람의 손맛과 자연의 조화에 있다. 밥맛의 언어가 살아 있는 지역, 밥 냄새로 계절을 읽을 수 있는 고장. 그것이 전남이다. 전남의 쌀과 밥맛의 언어는 단순한 맛의 기록이 아니라, 흙과 물, 사람의 시간을 품은 문화적 시(詩)이자 남도의 맛이다.
남도의 그 맛은 쌀에서 시작해 밥맛과 식탁의 맛으로 이어지며 다양한 표현 언어를 낳았다. 그러나 오늘날 고령 인구의 감소와 함께 이러한 언어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전남만의 쌀과 밥맛의 특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라진 미각의 언어를 찾아 복원하고, 세대 간 전승을 통해 다시 살려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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