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전남인터넷신문]‘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 산하 고려인문화관(관장 김병학)이 광복 80주년을 맞아 마련한 ‘한글문학 기획전’이 디아스포라 문학의 가치를 다시 비추고 있다.이번 전시의 중심에는 고려인 문학의 근간을 세대와 국경 너머로 이어온 시인·평론가 허진(본명 허웅배, 1928~1997)의 문학적 궤적이 자리한다.
허진은 1937년 스탈린 강제이주 이후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살아남은 고려인 공동체의 상처와 기억을 시로 기록해 온 대표적 문인이다. 그의 작품은 한 세기의 이주와 상실, 언어와 정체성의 흔들림을 담아내며,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걸어온 길을 생생한 문학적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남긴 시구 가운데 많은 이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잃은 고향은 지도에서 사라졌으나, 말의 어머니가 된 우리 가슴에서는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이 구절은 강제이주 2세대가 감내해야 했던 상실, 그리고 후손들이 이어가야 했던 ‘언어의 귀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허진이 창작한 희곡 〈사랑, 사랑, 사랑…〉은 작곡가 한 야꼬브의 음악과 결합해, 고려인 문예사에서 중요한 무대예술 작품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허진의 삶 또한 문학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1950년대 북한 국비유학생으로 모스크바에 파견된 그는 귀국을 거부하고 망명을 선택했다. 이후 김종훈, 한대용(필명 한진), 리경진(리진) 등 동료 망명 작가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 CIS 지역에서 활동하며 고려인 언론·문예지·문화단체와 깊이 협력했다. 그는 시 창작과 문학평론을 통해 한글문학의 불씨를 지켜내고, 공동체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김병학 고려인문화관장은 “허진 선생은 문학을 통해 공동체의 언어를 지켜낸 귀중한 증언자였으며, 그의 기록은 잊혀질 뻔한 역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아름다운 유산”이라며 “그의 정신은 오늘날 고려인 문학의 확장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고려인마을은 앞으로 허진의 생애와 작품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관련 자료 조사, 전시 확대, 전문가 세미나 등 다양한 문화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따라서 이번 ‘한글문학 기획전’은 단순한 과거의 전시가 아니다. 이곳에서 되살아나는 허진의 문학은 흩어진 민족의 언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미래를 향해 이어지고 있는지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들려주고 있다.
고려방송: 이부형 (고려인마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