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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가 몸이 되는 순간, 겨울철 논고동의 재발견 - 곽경자 이학박사(곽경자 식초담다 대표, 전남도립대학 식품생명과학과 겸…
  • 기사등록 2026-01-19 08:5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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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찬바람이 대지의 숨구멍을 틀어막는 한겨울, 논바닥은 죽은 듯 고요해 보이지만 그 완고한 흙 아래에선 가장 치열한 생존의 비움이 일어나고 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은 이 계절, 꽝꽝 얼어붙은 논바닥을 파헤치다 보면 투박한 껍질 속에 제 생명을 오롯이 가두고 숨죽인 논고동을 만난다.

 

사람들은 흔히 고동이 살찌는 계절을 풍요로운 여름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고동이 진정으로 완성되는 시기는 이 시린 겨울이다. 외부의 화려한 성장을 멈추고 제 안의 노폐물을 비워내며, 오로지 본질적인 생명력만을 응축해내는 시간. 그 고요한 인내의 산물인 겨울 논고동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흙과 미생물, 그리고 사람의 생리를 하나로 잇는 생태적 치유음식이다.

 

겨울 땅속에서 깊은 잠에 든 논고동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흙과 미생물, 그리고 사람의 생리를 하나로 잇는 생태적 치유 음식이다. 30년 넘게 전통 발효를 연구하며 현장을 지켜온 나에게 논고동은 ‘재료’ 이전에 ‘시간’이자 ‘환경’이며, 몸으로 체득한 생태의 언어 그 자체다.

 

땅만 보고 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늘 늦가을 논바닥에서 시작된다. 추수가 끝나 텅 빈 검은 논바닥의 적막은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선명하다. 마을 뒤 월각산(강진) 아래,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길을 가두던 둠벙 논. 11월 무렵 무와 배추가 속을 든든히 채워갈 때면,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논바닥 깊숙이 숨은 고동의 숨구멍을 찾아내곤 하셨다.

 

신이 나서 고동을 캐다 보면 어느새 해는 기울고, 시린 논바닥의 냉기가 발끝을 타고 올라와 손가락 끝이 얼얼해졌다. 갑자기 덮쳐온 어둠 속에 엄마가 보이지 않아 울먹이며 이름을 부르던 그 기억은 여전히 슬프도록 선명한 풍경으로 남아 있다.

 

엄마와 나는 밭과 논에서 계절을 함께 배웠다. 봄에는 우렁이를 줍고 겨울에는 고동을 캐며, 우리는 말 없는 생명의 질서를 몸소 익혔다. 우렁이는 가을이면 수십 마리의 새끼를 몸 안에 품고 겨울잠에 들어간다. 그러다 봄이 와 논에 물이 차고 온기가 돌면 땅 위로 올라와 새끼를 낳는다. 어린 성채 같은 새끼들을 모두 세상으로 내보낸 어미 우렁이는 비로소 텅 빈 상태가 된다. 완전한 희생 끝에 남겨진 빈 둥지의 쇠락.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생태가 가르치는 생리와 삶의 숭고한 질서를 보았다.

 

겨울 논은 가장 정화된 환경이다. 농약과 비료 등 외부 유기물의 유입이 차단된 상태에서 논고동은 체내 노폐물을 비워내고 깊은 휴면에 들어간다. 불필요한 대사 부산물을 최소화하며 미생물과의 공생 균형을 유지하는 이 시기의 논고동은 자극적인 영양이 아니라, 몸을 가라앉히고 회복을 돕는 '치유의 영양'을 품게 된다.

 

이 계절의 논고동은 단백질과 아미노산이 밀도 있게 농축된다. 활동기에는 성장에 쓰이던 에너지가 겨울에는 조직 유지와 생존으로 전환되어 단백질 구조가 안정화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람의 몸에 들어와서도 급격히 치솟는 기운이 아닌, 느리지만 지속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특히 저온과 저산소의 가혹한 환경을 견디기 위해 항산화와 세포 보호 중심으로 생리 상태가 바뀌면서, 칼슘·마그네슘·철·아연 같은 미네랄의 결합력 또한 극대화된다.

 

논고동이 선사하는 치유의 핵심은 바로 이 '역설적 충만함'에 있다. 현대인의 질병은 대개 과잉된 섭취와 속도에서 비롯되지만, 겨울 논고동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대사를 멈추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다. 오로지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만을 응축하는 그 과정은 흡사 수행자의 묵언수행과도 닮아 있다.

 

따라서 이 계절의 논고동을 섭취하는 것은 단순히 영양을 취하는 행위를 넘어, 자연의 '멈춤'과 '비움'의 리듬을 우리 몸에 이식하는 과정이다. 응축된 생명력은 염증으로 들뜬 혈액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과부하가 걸린 간과 신장의 해독 체계를 부드럽게 재가동한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계절을 견뎌낸 존재가 주는 위로는 각별하다. 어미 우렁이가 제 몸을 다 비워 새끼를 살리듯, 겨울 고동 또한 자신을 정화하여 인간의 생기를 북돋는다. 이것은 식재료를 넘어, 상처 입은 몸이 스스로를 보수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돕는 생태적 처방전이다. 결국 논고동의 치유란, 자연의 긴 호흡에 나의 맥박을 맞추어 무너진 생리적 균형을 본연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일이다.

 

참고 문헌

곽경자. 2026. 몸이 기억하는 소울푸드, 콩나물김치국과 콩나물김치죽.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1-13).

곽경자. 2026. 겨울철 국민 힐링 음식, 동치미의 미학. 변동불거의 시대, 가장 오래된 위안 막걸리 한 잔.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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