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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과 우수, 치유의 문을 열다 - 전주기전대학 치유농업과 최연우 교수
  • 기사등록 2026-02-22 09: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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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설에 명절 인사차 시골의 친척집을 들렀다. 입춘이 지났지만 대문에는 여전히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 쓴 붓글씨가 붙어 있었다. 겨울 끝자락의 찬 기운 속에서도 사람들은 이미 봄을 마음에 들여놓고 있었다. 며칠 뒤 우수(雨水)도 지났다. 얼음이 녹고, 눈이 비로 바뀐다는 절기. 입춘과 우수는 단지 달력의 표식이 아니라, 삶의 리듬을 바꾸는 신호였다. 나는 그 문 앞에서, 절기와 치유농업이 얼마나 닮아 있는가를 다시 생각했다.

 

입춘은 ‘봄이 시작된다’는 선언이다. 실제 들녘이 하루아침에 푸르게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은 먼저 움직인다. 농부는 종자와 모종을 준비하고, 밭을 고르며, 한 해의 농사를 설계한다. 치유농업에서도 입춘은 ‘의지의 전환’과 같다. 아직 삶의 조건이 완전히 바뀌지 않았더라도, 회복을 향한 방향을 설정하는 순간이 필요하다. 치유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그 시작은 언제나 마음의 봄을 여는 일이다.

 

이어지는 우수는 보다 구체적이다.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고, 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눈이 녹아 물이 되고, 고인 물이 흘러내리며 생명의 순환을 준비한다. 치유농업 현장에서 우리는 이 ‘물의 전환’을 자주 경험한다. 굳어 있던 감정이 조금씩 말로 흘러나오고, 굳은 표정이 완만해진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단순한 행위 속에서 참여자는 자신의 감정을 천천히 녹인다. 우수는 자연의 해빙이지만, 동시에 마음의 해빙이기도 하다.

 

우리 조상들은 절기를 단순한 농사 일정으로만 이해하지 않았다. 입춘대길이라는 글귀를 대문에 붙이는 행위는, 봄의 기운을 집 안으로 들이는 상징적 의례였다. 이는 일종의 ‘의례 기반 치유’라 할 수 있다. 반복되는 상징 행위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새로운 출발에 대한 기대를 공유하게 한다. 치유농업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의식적으로 체험하도록 돕는 프로그램은 큰 의미를 지닌다. 봄맞이 파종 행사, 모종 심기 체험, 절기 음식 나누기 등은 공동체적 회복을 촉진하는 장치가 된다.

 

입춘과 우수는 음양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음의 기운이 강했던 겨울이 물러나고, 양의 기운이 서서히 고개를 든다. 치유농업은 이 균형의 원리를 실천의 장으로 옮긴다. 활동과 휴식, 노동과 관조, 자극과 안정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일. 겨울 내내 움츠렸던 몸을 갑자기 과도하게 움직이게 하기보다, 천천히 흙을 만지고, 새싹을 바라보고, 물을 주는 리듬을 회복하도록 돕는다. 절기는 무리하지 않는 전환의 지혜를 알려준다.

 

또한 절기는 공동체의 시간이다. 농촌에서는 절기에 맞추어 모이고, 나누고, 준비한다. 치유농업 역시 개인의 회복을 넘어 공동체적 관계 회복을 지향한다. 함께 밭을 일구고, 수확을 나누며,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입춘대길의 붓글씨가 단지 개인의 소망이 아니라 가족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글귀였듯, 치유농업의 목표도 ‘나만의 치유’를 넘어선다.

 

절기를 잊은 도시의 삶은 늘 비슷한 속도로 반복된다. 그러나 자연의 시간에 귀 기울이면, 우리 몸과 마음 역시 계절을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입춘은 결심의 시간이고, 우수는 녹임의 시간이다. 그 사이에서 씨앗은 준비되고, 물은 흐르며, 삶은 다시 순환한다.

 

시골 대문에 붙어 있던 입춘대길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치유농업은 거창한 치료 기법 이전에, 절기의 리듬을 회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봄이 온다고 믿는 마음, 얼음이 녹는 소리를 듣는 감각, 그리고 그 흐름에 자신을 맞추는 태도. 입춘과 우수는 그렇게 우리에게 말한다. 치유는 계절처럼 온다고. 다만 우리는 그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참고문헌

최연우. 2026. 수기치인, 공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치유농업.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2.20.).

최연우. 2026. 유약지강, 도교와 노자로 읽는 치유농업.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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