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전쟁은 끝나도 그 기억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전쟁에 의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는 불면, 과각성(자극에 대해 정상보다 과민하게 반응하는 상태), 고립감은 일상의 일부가 된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군인들을 위해 약물과 상담 중심 치료를 넘어, 생활 전반을 재구성하는 ‘전인적 건강 접근(Whole Health Approach)’을 확대하고 있다. 그 속에 음식과 요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미국 재향군인부(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 VA)는 전국 의료시설에서 ‘건강 교육용 조리실(Healthy Teaching Kitchen)’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는 특정 질환만을 겨냥한 치료 프로그램이라기보다, 만성질환 관리와 생활습관 개선을 목표로 한 실습형 영양 교육 과정이다. 당뇨, 고혈압, 비만 환자가 주요 대상이지만, PTSD를 포함한 정신건강 문제를 겪는 재향군인도 참여할 수 있다.
프로그램은 영양사 주도로 진행되며, 참가자들은 실제 조리 실습을 통해 저염·저당·항염 식단을 배운다. 식재료 선택법, 조리 방법, 식단 구성 원칙을 익히고, 완성된 음식을 함께 나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영양 교육을 넘어선다. 칼과 도마를 잡고, 재료를 손질하고, 한 끼 식사를 완성하는 경험은 자기 통제감을 회복하는 행위가 된다. PTSD의 핵심 증상 가운데 하나가 삶의 통제 상실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 클리닉(Cleveland Clinic)이 운영하는 ‘요리 의학(Culinary Medicine)’ 프로그램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이곳은 병원 내 조리실에서 의료진과 셰프, 영양사가 협력해 만성질환 환자 대상 요리 수업을 진행한다. 공식적으로 PTSD 전용 프로그램을 표방하지는 않지만, 정신건강 관리가 필요한 환자 역시 참여할 수 있다. 음식은 약물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건강 회복의 실제 기술로 다루어진다.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툴레인대학교 의과대학(Tulane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내 골드링 요리의학센터(Goldring Center for Culinary Medicine)은 의과대학 정규 교육과정에 요리 의학을 포함시켰다. 의대생은 환자에게 ‘무엇을 먹으라’고 처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어떻게 조리하고 실천할 것인지까지 배우게 된다. 지역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한 요리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되며, 재향군인을 포함한 다양한 집단이 참여한다.
이들 기관은 공통적으로 음식 프로그램을 정신질환의 직접 치료법으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국재향군인부가 강조하는 통합 건강(Whole Health) 모델은 신체, 마음, 관계, 생활습관을 하나의 건강 체계로 본다. 음식은 그 체계를 지탱하는 핵심 축 가운데 하나다. 규칙적인 식사, 신선한 재료 선택, 함께 나누는 식탁은 심리적 안정과 사회적 연결을 돕는 환경을 만든다.
연구와 현장 보고에 따르면, 이러한 실습형 요리 프로그램은 스트레스 감소 경향, 식습관 개선, 체중 관리, 사회적 고립 완화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 PTSD 환자에게는 특히 공동 활동과 협업 경험이 고립감을 낮추는 요소로 작용한다. “내가 직접 준비한 음식으로 나를 돌본다”는 감각은 작지만 분명한 변화다.
음식이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음식은 일상을 재구성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병원 안의 조리실과 공동 식탁은 군인의 회복을 돕는 또 하나의 공간이 된다. 전쟁의 기억을 지닌 몸에, 다른 리듬을 심는 일. 미국의 사례는 치유가 거창한 처방이 아니라 생활의 구조 속에서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식탁은 때로, 가장 조용하지만 단단한 회복의 자리다.
참고문헌
김현주. 2026. 치유농업에서 음식치유가 활성화되어야 하는 이유치유농업에서 음식치유가 활성화되어야 하는 이유.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02-23)
김현주. 2026.치유농업 음식치유의 새로운 조건과 전기숟가락.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