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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생활 발효, 고문헌 속 식초와 수치 - 곽경자 이학박사(곽경자 식초담다 대표, 전남도립대학 식품생명과학과 겸…
  • 기사등록 2026-03-03 10: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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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식초는 오늘의 식탁에서 흔한 양념이다. 그러나 고문헌을 펼쳐 보면 초(醋)는 보다 분명한 기능을 가진 재료로 등장한다. 만병통치의 약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발효 저장의 기술이자 약재 가공에 쓰인 보조 재료로서 자리를 지켜 왔다.

 

중국 북위 시대 농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 6세기)》에는 곡물을 발효시켜 초를 만드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초가 일찍부터 독립된 발효 산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 주는 기록이다. 조선 후기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19세기 초)》와 《산림경제(山林經濟, 1715년경)》에서도 초의 제조와 활용이 등장한다. 이들 문헌에서 초는 술·장과 함께 농가에서 만들 수 있는 발효식품으로 다뤄진다. 초는 부엌의 양념이면서 동시에 생활 가공 기술의 일부였다.

 

살림서인 《규합총서(閨閤叢書, 1809년)》에도 초의 쓰임이 보인다. 생선의 비린내를 줄이고 음식의 맛을 정리하는 데 활용된다는 내용이다. 오늘날의 과학 용어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산미를 이용해 음식의 상함을 늦추려는 경험적 지식이 담겨 있다.

 

의학서에서도 초의 기록은 확인된다. 《동의보감(東醫寶鑑, 1613년)》에는 ‘醋(초)’가 약물 가공과 관련해 등장한다. 특히 일부 약재를 “초로 볶는다(醋炒)”는 수치(修治)법이 기록되어 있다. 수치란 약재를 사용하기 전에 덖거나 찌거나, 특정 재료와 함께 처리해 성질을 조정하는 과정을 말한다. 여기서 초는 약의 효능을 돕거나 성질을 조절하는 보조 재료로 쓰인다.

 

이 기록은 식초가 단순한 식재료에 그치지 않고, 약재 가공에 활용되었음을 알려 준다. 다만 초가 독립적인 치료약으로 크게 다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은 수치 과정에서 약성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고문헌에 나타난 초의 위치는 분명하면서도 절제되어 있다. 하나는 발효와 저장의 기술로서의 위치이고, 다른 하나는 약재를 다루는 과정에서의 보조적 역할이다. 과장된 효능보다는 생활 속 활용이 중심에 놓여 있다.

 

오늘날 식초를 둘러싼 건강 담론은 때로 기대를 앞세운다. 그러나 문헌이 전하는 메시지는 차분하다. 초는 발효의 산물이었고, 부엌과 약방에서 기능을 맡은 재료였다. 화려한 치료약은 아니었지만, 음식과 약 사이에서 조용히 쓰였다.

 

고문헌 속 식초는 오래된 치유의 상징이라기보다, 오래된 조정과 가공의 기술에 가깝다. 그 절제된 기록을 따라 읽다 보면, 발효 문화에 대한 이해도 자연스럽게 깊어진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치유음식도 거창한 처방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식초처럼 오래전부터 쓰여 온 발효 재료 속에는 시간과 절제, 순환의 경험이 담겨 있다. 치유는 특별한 성분이 아니라, 삶을 다루는 방식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고문헌은 조용히 전하고 있다.

  

또한 발효는 기다림의 기술이다. 곡물이 술이 되고, 술이 다시 초로 변하는 과정에는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하지 않는 시간이 놓여 있다. 고문헌 속 초는 그 시간을 관리하는 지혜의 산물이었다. 농가의 부엌과 약방에서 초가 맡은 역할은 크지 않았지만, 분명했다.

 

그것은 넘치지 않고 모자라지 않게, 맛을 다듬고 약성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치유 역시 다르지 않다. 극적인 변화보다 생활의 흐름을 바로잡고, 감정과 몸의 균형을 조율하는 과정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식초가 음식과 약 사이에서 조용히 맛을 정리하듯, 우리 삶에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조율의 시간이 필요하다.

 

참고 문헌

임은지, 차경희. 2010. 고문헌을 통해 본 조선시대 식초 제조에 관한 연구.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25(6):680-707.

곽경자. 2026. 연산오계, 토종 유전자와 생태산업의 길.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3-2).

곽경자. 2026. 구황작물 메밀, 전통 발효가 빚은 설날의 메밀묵.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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