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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위니컷과 전이 대상으로 읽는 치유농업 - 전주기전대학 치유농업과 최연우 교수
  • 기사등록 2026-03-26 09: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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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치유농업 현장에서 자주 목격되는 장면이 있다. 처음 농장에 온 참여자가 말없이 흙을 만지다가 어느 순간 작은 화분을 고르고, 그 안에 씨앗을 심는다. 이후에는 그 식물을 반복적으로 바라보고, 물을 주며, 때로는 말을 건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활동처럼 보이지만, 이 과정에는 인간의 정서 회복과 깊이 연결된 심리적 구조가 작용하고 있다. 이 장면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이론이 바로 도널드 위니컷(Donald W. Winnicott)의 전이대상과 놀이 이론이다.

 

도널드 우즈 위니컷(1896~1971)은 영국의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이후 런던에서 소아과와 정신분석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는 유아 발달과 어머니-아이 관계 연구를 통해 전이대상, 충분히 좋은 어머니(good enough mother), 놀이의 중요성 등의 개념을 정립하며 현대 발달심리와 상담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위니컷은 인간 발달에서 ‘전이대상(transitional object)’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유아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경험한 안정감을 외부 대상에 옮겨 담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대상이다. 인형, 담요, 장난감과 같은 물건이 대표적이며, 이 대상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중요한 점은 이 대상이 ‘현실’과 ‘내면’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영역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위니컷은 이를 ‘전이공간(transitional space)’이라 불렀고, 이 공간에서 놀이와 창조, 그리고 자기 형성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치유농업에서의 식물은 하나의 전이대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식물은 인간과 달리 판단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으며, 일정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물을 주면 자라고, 돌보지 않으면 시든다. 이러한 예측 가능한 반응은 참여자에게 안정감을 제공한다. 특히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거나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식물은 부담 없는 관계 대상이 된다. 이는 인간 관계에서 경험하는 긴장이나 평가의 부담 없이도 ‘돌봄’과 ‘연결’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위니컷이 강조한 ‘놀이’의 개념 역시 치유농업과 깊이 맞닿아 있다. 위니컷에게 놀이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자기(self)가 형성되고 세계와 관계를 맺는 핵심 과정이다. 놀이는 강요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때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 치유농업에서의 활동 역시 이러한 특성을 지닌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수확을 하는 일련의 과정은 생산 활동이면서 동시에 놀이적 경험이다. 특히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농작업은 참여자가 ‘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해보고 싶다’라는 상태로 이동하게 만든다.

 

이러한 놀이적 경험은 심리적 회복에 중요한 조건이 된다.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성과와 효율 중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평가받고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치유농업의 공간에서는 생산성보다 경험이,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는 위니컷이 말한 ‘충분히 좋은 환경(good enough environment)’과 유사한 조건을 형성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실패해도 괜찮은 환경 속에서 개인은 점차 자신을 드러내고, 안정감을 회복하며, 자기 자신과 다시 연결된다.

  

특히 발달장애 아동이나 치매 노인과 같은 대상에게 치유농업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들은 언어적 소통이나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식물은 언어를 요구하지 않는다. 물을 주고, 만지고, 바라보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관계가 형성된다. 이 과정에서 식물은 전이대상으로서 정서적 지지 역할을 수행하고, 참여자는 반복적인 돌봄을 통해 안정된 리듬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불안 감소와 정서 안정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치유농업에서 중요한 것은 식물을 단순한 ‘재배 대상’이 아니라 ‘관계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식물은 인간의 감정을 투사하고, 돌봄을 실천하며, 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이러한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확장되는 중간 단계가 되기도 한다. 즉, 식물과의 관계 경험은 사회적 관계 회복의 기반이 된다.

 

따라서 위니컷의 이론은 치유농업을 단순한 체험 프로그램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심리적 공간으로 이해하게 한다. 농장은 생산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전이공간이며, 식물은 작물이면서 동시에 전이대상이다. 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은 노동이면서 놀이이고, 돌봄이면서 자기 회복의 과정이다.

 

치유농업의 본질은 식물의 종자를 파종하고, 재배하는 과정 등 어떤 관계가 형성되고, 어떤 경험이 축적되느냐에 있다. 위니컷의 전이대상과 놀이이론은 바로 이 부분을 설명해 주는 중요한 이론적 틀이다. 치유농업은 자연을 매개로 인간이 다시 자신과 연결되는 과정이며, 그 중심에는 식물이라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전이대상이 존재하고 있다.

 

참고문헌

최연우. 2026. 인간중심 심리학이 여는 회복의 농업, 칼 로저스와 치유농업.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3.21.).

최연우. 2026.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치유농업: 무의식, 자연, 그리고 회복의 장.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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