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이 연해주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잊혀진 발자취를 재조명하고 있는 가운데, 1921년 자유시참변 당시 독립군의 강제 무장해제에 저항하다 체포돼 러시아 감옥에서 순국한 손병렬(孫炳烈·1889~1923) 선생의 삶이 주목받고 있다.
6일 광주 고려인마을에 따르면 마을 산하 고려방송(FM 93.5MHz)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고려신문과 공동 추진하는 '연해주 고려인 독립유공자 후손 발굴 및 지원사업'의 서른 다섯 번째 인물로 손병렬 선생을 선정하고 그의 항일투쟁과 순국의 역사를 소개했다.
1889년생으로 추정되는 손 선생은 출생지와 성장 과정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1920년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한 한인 무장독립군 부대인 사할린의용대 장교로 조국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참여했다.
당시 일본군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서 패배한 뒤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과 한인 마을 학살에 나섰다. 이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 독립군 부대들은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러시아 자유시로 집결했다.
그러나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은 군 지휘권을 둘러싼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갈등에 휘말렸고, 사할린의용대와 자유대대 간 대립은 결국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손 선생은 1921년 6월 21일 사할린의용대 장교들과 함께 고려혁명군정의회 지도부인 김하석·최고려·오하묵 등의 퇴진을 요구하는 혈서를 작성해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칼란다리쉬빌리에게 제출했다.
이후 일시적인 타협이 이뤄졌으나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사할린의용대의 병력을 축소하고 부대를 분리하는 편제안을 발표하면서 갈등이 다시 격화됐다.
결국 같은 달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가 수라젭카에 주둔한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에 나섰다. 독립군은 이에 저항했으나 무력충돌 끝에 항복했고, 864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이 사건이 한국 독립운동사의 비극으로 기록된 '자유시참변'이다.
손 선생도 이 과정에서 체포돼 중범죄자로 분류된 72명 가운데 한 명으로 같은 해 7월 30일 이르쿠츠크로 압송됐다. 이후 재판에 넘겨져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3년 끝내 순국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청춘을 바쳤던 독립군 장교가 광복을 보지 못한 채 35세 전후의 젊은 나이로 이국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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